종려주일(20220410)
거룩한 침묵의 소리
시편 118:1~2, 19~29
요한복음 12:12~16
누가복음 19:28~40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군중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때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니 그때 잡아서, 군중을 선동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환영하는 군중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군중이 이토록 환영을 하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이미 계획을 짜놓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줏대 없이 그저 휩쓸려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군중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실 때 열렬히 환영했던 이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라바!”를 외쳤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라는 희생양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죽이신 부활이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인간의 뜻은 수시로 수정되어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뤄집니다. 이것을 믿고,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양만 그리스도인입니다. 흡사 그리스도인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열려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은총은 주어지지만, 그 은총을 선물로 받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저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혼자만의 독방에서 조용하게 묵상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 메시야를 노래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외쳤던 노래는 무엇입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2:38).”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이 부른 노래, 누가복음 2장 14절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그렇습니다, 군중들의 노래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게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하는 개선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이때라도 군중이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며 고대하던 메시아와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차이를 눈치를 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바리새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침묵하게 하시오!” 책망 할 때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대로 이미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을 공개 수배했고, 신성모독죄를 걸어 죽이고자 했습니다. 군중은 메시아의 노래를 부르지만, 메시아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역시도 군중의 노래에 감동하지만, 병행본문 요한복음 12장 16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조차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신 후에야,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와 군중의 노래와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메시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만, 그 노래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기까지는 많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표면적인 신앙의 달콤함을 넘어 심층의 신앙까지 나아가야, 우리의 노래와 찬양이 이름다운 찬양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뜻을 다 알지 못하고 부르는 찬양이라고 할지라도, 그 찬양이 예수님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강요하는 바리새인에게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서 풀면,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과 지금 여기에서 행하시고 계시는 일들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잘하고 있습니까?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봐도 못 본척하고 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반도국가에 사는 민족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서 늘 약탈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기에 ‘적당히 눈치 보며 사는 처세술’을 지혜인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괜히 껴들었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을 처세술로 가르쳤고, 침묵은 금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반도국가에서의 침묵은 ‘침묵의 소리 혹은 거룩한 침묵’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비겁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화된 지구촌에서 강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악상들에 대해 ‘침묵’하게 했고, 침묵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총칼을 휘둘렀습니다. 권력만 잡으면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대한민국 언론은 알아서 침묵할 뿐만 아니라 권력에 아부하는 데 익숙합니다.
▪ 비겁한 침묵의 시대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최근 대한민국에 대해 흥미로운 것을 발표했습니다. 일찍이 대한민국처럼 민주화를 이룬 나라가 없는데, 여전히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언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민주화와 세계 최고의 인터넷망은 가짜뉴스를 양산해 냈고, 메이저 언론은 할 말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말만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권력만을 위해 봉사하다 보니 민주화는 일찍 이뤘지만, 여전히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류는 ‘비겁한 침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알아야 할 것보다 알지 않아도 될 것에 지나치게 노출된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봐야만 하고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삽니다.
이렇게 인간이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하자 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소리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힘 있는 자들은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런 시대를 살아왔지만, 듣지 않으려 했고, 보지 않으려 했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2007년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세계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 그의 소리를 경청하고, 인류가 기후변화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건강한 지구촌을 이루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의 문제뿐 아니라, GMO씨앗으로 인한 식량의 무기화와 유전자변이의 문제,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원자력폐기물 문제, 쓰레기 문제 등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그 결과는 돌들의 외침으로 돌아왔습니다. 북극 빙하의 해빙 속에서 피골상접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북극곰, 사막화, 꿀벌의 실종, 코로나, 조류독감 AI의 창궐, 물고기의 혈액은 물론이고 인간의 혈액 속에서 발견되는 미세 플라스틱, 기형 물고기와 동물들, 하루에 최소한 한 종씩 멸종되어가는 동식물들...이 모든 것들이 소위 ‘돌들의 외침’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리치지 않으니 그들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리쳐도 듣지 않으니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소리를 대변해야 합니다. 그들의 소리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들리지 않는 소리도 대변해야 합니다.
‘거룩한 침묵의 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침묵과 소리는 전혀 반대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어지러운 소식도 잠시 접어두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오락이나 이방인들의 염려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침묵’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나고 나면 ‘고난주간’이 이어집니다. 고난주간만큼이라도 거룩한 침묵의 시간을 갖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침묵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일상적으로 행하던 일들을 잠시 멈추고, 거룩한 시간, 묵상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냥 앉아서 기도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난주간’이라고 하니까 우울하게 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길(Via - Dolorosa)가 있었기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하고, 주님의 고난에 감사하고, 내 삶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깊은 감사는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자신만의 노력과 수고로 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모두 공짜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충만해지면, 감사가 넘칩니다. 감사가 넘치면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삶에서 이웃을 향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커지면, 사람뿐 아니라 자연에 이르기까지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거룩한 침묵의 소리’를 듣는 시작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아무리 무딘 사람도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봄입니다. 이 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연의 품에 안겨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사람들이 침묵하는 시대이므로 그들은 더 많은 말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 말이 아픈 말일 수도 있겠지만, 불편한 진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들어야 하고, 그들이 소리 치고 아우성친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봄을 보시면서, 느끼시면서 주님의 부활을 느끼고 보시는 한 주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라는 비전으로 새해를 열어주신 주님,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거룩한 소리가 침묵하고 있어 돌들이 소리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주님,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셔서, 거룩한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옵소서. 고난주간에 거룩한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게 하시고, 주님의 부활이 또한 우리의 부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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