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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5주] 거룩한 낭비-향유를 부은 마리아

  • 관리자
  • 2022-04-0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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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5주(20220403)
거룩한 낭비

이사야 43:16~21 / 시편 126 / 빌립보서 3: 4b~14
요한복음 12:1~8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여러분,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 절기를 보낼수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실 시간이 가까워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일과 요한복음의 말씀은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유월절이 시작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긴박하게 지나고, 속전속결로 예수님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 사순절 5주 성서일과


시가서 시편 126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큰일이요,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기쁘게 살아갈 수(시편 126:3)’ 있다고 고백합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는 첫 번째 출애굽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물을 내는(사 43:19)’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곧 제2의 출애굽을 준비하고 계시니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바벨론 유배지의 백성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서신서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살고자 하는 바울은 과거의 영광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빌 3:14)’ 달려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복음서의 본문은 모세의 첫 번째 출애굽과 바벨론유수지에서의 귀향으로 돌아온 두 번째 출애굽이 이어 제3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베다니 마을에 살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내용이 나옵니다. 



큰일, 기적과도 같은 일, 과거의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는 일은 모두 거룩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당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굳이 과거의 영광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마리아의 경우에도 삼백 데나리온 짜리 나드 향유를 모두 소비한다는 것이 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행동이 과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이들과 예수님의 하실 일을 예비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


고대근동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6명의 마리아가 등장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냥 상식선에서만 알고 계셔도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고침을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로서 물질로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고, 예수님 곁에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목격한 여인입니다.  세 번째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네 번째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다섯 번째는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의 누님이자 마가라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행 12:12), 여섯 번째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와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전해 내려오는 전승들 때문에 지금도 혼선이 있습니다. 그런 혼선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서 찬송가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라는 잘못된 가사로 여전히 불려 지기도 합니다.

찬송가에 제시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한 여자’는  46절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창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는데, 베다니 마을이었다는 것뿐 아니라 나사로와 마르다가 등장하면서 바로 ‘마리아’가 등장하기 때문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향유를 붓기 직전의 상황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맹인이라하고, 절도요 강도짓을 일삼는 삯꾼들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요,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급기야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라고 선언하신 후에 신성모독죄를 걸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잠시 세례를 받으셨던 요단강 근처로 피했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오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셨지만,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기적을 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피해 에브라임으로 가서 머무십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들은 유월절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이니 그때 잡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면 신고하라고 합니다. 공개수배범이 되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서 5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오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광화문까지가 5km입니다.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이었는지, 아니면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이유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주 생생하게 경험한 여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오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겠다.”면서 봉사하는 일을 뒤로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더 시급한 일은 복음을 전하시는 일이었고, 복음의 소식을 들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복음을 듣는 일을 택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칭찬하신 것이지 마르다를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인지, 마리아는 죽었던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경험한 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확신했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도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다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 그러니 향유를 붓는 일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조금 이해했습니다. 의심이 많은 이유는, 고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질문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의심도 고민을 해봐야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1945년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통찰력과 신학적 깊이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성전에 올라가려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다는 소문이 오버랩 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일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귀하게 보관하고 있던 나드 향유를 꺼내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 행위는 자기를 종처럼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축복하고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내 생각이 있지만, 예수님의 뜻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 이것은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이 귀한 믿음은 ‘거룩한 낭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 것입니다.
 

■ 거룩한 낭비


하지만,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비난’을 했다고 하고, 마가복음에는 ‘어떤 사람들이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인물로 거론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뿐 아니라, 그곳에 있던 대부분이 값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일 년 동안 품삯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명분도 좋고 이웃 사랑하는 마음도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앞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자신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 이상으로 예수님의 뜻을 헤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 마리아만이 ‘거룩한 낭비’를 통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땀 흘려서 애써 모은 재물을 의미 있게 사용하려면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부자입니다.

나눔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한남교회를 건강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가는 데도 여러분의 건강한 낭비가 필요합니다. 토요일 오셔서 예배준비하는 일, 주일성수하는 일, 성가대로 봉사하는 일, 헌금하는 일, 교회당 이곳저곳 손보는 일 모두가 거룩한 낭비입니다. ‘거룩한 낭비’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드리는 것, 이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 지극히 작은 일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었던 가룟 유다를 위시한 제자들과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줍니다.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제자들은 도망침으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군중들은 “바라바!”를 외쳤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각각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조한 일들은 지극히 작은 일이거나, 명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극히 작은 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뜻에 맞춰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을 의지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똑 같은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일을 할 때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줄 모르면 아주 작은 일로도 교회에 분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할 때에는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의견’을 접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교회를 위해서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틈’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작은 균열이 둑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작은 틈으로 빛이 들어와 생명을 살리기도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불평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받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항상 곁에 있는 이유는 ‘거룩한 낭비’를 할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받습니다.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요, 가난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들을 돕는 일이 곧 하나님을 돕는 일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물질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만의 행복에 젖어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인 약자들과 소수자들이 당하는 아픔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아픔을 보는 일은 편치 않은 일이지만,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거룩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보며 분노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요, 그들을 돕고자 물질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이라도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큰일을 행하는 시작입니다. 그런 행동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농부가 기쁨의 단을 거두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씨를 뿌릴 때,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져 낭비되는 씨앗도 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한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 주간 동안 선한 일을 위해 ‘거룩한 낭비’를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차고 넘치는 은혜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관데 독생자 예수님을 가장 깊은 고난의 정점에 서게 하셨습니까? 이런 과한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거룩한 낭비’를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이 일을 함에 있어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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