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둘째주일(20220313)
땅의 일과 하늘의 일
누가복음 13:31~35
빌립보서 3:17~4:1
창세기 15:1~12, 19~29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지난주에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을 5년간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했습니다.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더라도 선거과정에서 갈라지고 분열된 모든 것들이 화합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정치는 국민의 수준만큼 이라고 합니다. 국민의 정치의식이 낮으면, 권력의 맛에 길든 이들의 조종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국민들이 성숙한 정치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분봉왕 헤롯, 총독 빌라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로마제국은 직접 통치하면서 식민지 백성을 자극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꼭두각시 괴뢰정권을 세웁니다. 그것이 분봉왕 제도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행정을 집행할 총리를 둡니다. 로마제국으로서는 누가 분봉왕이든 총리든 할당된 세금만 제대로 들어오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세금이 적게 들어온다든지, 지역에서 민란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그들을 교체합니다. 그러니 분봉왕 헤롯이나 총독 빌라도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민란이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치부를 드러낸 이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예수님의 태어났을 때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살해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세속야망이 아주 큰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야망을 실현하려고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위해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결혼했다가 세례 요한의 비판에 직면하자 그를 참수합니다(마 14:1~12).

세례 요한만 죽이면 자신의 치부가 덮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첫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주며 지속해서 외쳤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가 등장했다는 것은 헤롯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헤롯은 참수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으로 환생한 것은 아닌가 믿을 정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켰다고도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예의주시하며 살폈습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지켜본 결과,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봐서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을 죽인 일로 미신적인 공포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기적 행함을 듣고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일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일에만 관심이 있던 헤롯은 행정관활권을 놓고 원수처럼 지내던 빌라도와 서로 친구가 되어(마 23:12)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섭니다. 악한 일을 할 때에는 원수라도 한 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누가복음 13장 31절에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 말을 전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며,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행동과 그들의 권위적인 행동을 꾸짖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옳은 말씀만 하시니 예수님의 비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들 곁에 있는 한 자신들의 종교적인 위치를 이용해서 누리던 이익이나 권위가 도전 받을 것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를 빌려 자신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선의의 말을 가장하여 헤롯의 의중을 확대하여 예수님을 위협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분봉왕이라고는 하지만 로마제국에서 조차도 예의를 갖춰 ‘왕’으로 부르는 ‘헤롯’인데 예수님은 “여우!”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헤롯에 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 당시 법집행의 관례에 따르면 예수님은 헤롯의 말 한마디에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헤롯과 각을 세우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세례 요한을 참수했던 사건과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만 힘쓰는 헤롯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에만 열중하는 헤롯은 포도원 이스라엘을 허무는 여우와도 같은 존재로 본 것입니다. 땅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헤롯이 예수님의 눈에 ‘여우’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어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은 헤롯이나 빌라도, 바리새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길을 가시고자 하고, 헤롯과 빌라도와 바리새인들은 땅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길을 걷고자 할 때에는 내일과 모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야만 하고, 그 길의 끝은 죽음의 길임을 아셨습니다. 만일, 바리새인들의 권고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의 길을 피할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하늘의 일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에게 전한 이야기는 ‘얼마동안 떠나’있었던 광야에서의 마귀의 유혹의 연장된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한탄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타락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길’을 버리고 ‘땅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을 이뤄야할 거룩한 도성이 ‘땅의 뜻’을 이루는 데만 혈안이 되어 거룩한 도성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돌로 치는 것’은 사술(레 20:27)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신 17:5,7)등과 같이 가증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땅의 일에 혈안이 되어 거룩한 도성마저도 더럽힌 것입니다.
하늘의 길과 대비되는 땅의 길 혹은 땅의 뜻, 땅의 일은 무엇입니까? 헤롯과 같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가진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부자들은 남들 보란 듯이 헌금하고,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위선자들은 길거리에서 보란 듯이 기도했고,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달은 겸손한 이들은 골방이나 광야에서 숨죽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와 너’를 자신들의 잣대로 거룩한 자와 죄인으로 구별했습니다. 온갖 권위와 권력을 쥐고 하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과 다른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을 죽이고 박해를 하고 죄인 취급할 때에는 ‘하늘의 뜻’을 받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개혁하려고 공생애 내내 노력하셨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예수님도 땅의 일에만 열심을 내는 이들 앞에서 어쩔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집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이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입니다. 지금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땅의 일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늘의 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일 역시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길을 하늘에서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하는 기도는 바로 ‘사이의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늘의 일은 목숨 걸고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위해서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내가 하늘의 일을 하면 죽이려고 들 것을 알지만, 그래서 죽겠지만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한 목숨 걸고 하늘의 일을 하겠다.’는 결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 걸고 하시는 그 일은 ‘메시아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아의 소명에 전부를 걸겠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아의 소명’을 갖고 오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도 각자에게 고유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명을 깨닫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 그 일을 삶의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목숨 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향한 계획을 세우셨을 때, 이 땅의 것, 이방인들의 염려에 해당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 이상의 소명을 주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매진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매진하는 일이 하늘의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방인의 염려에 빠지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힘쓰시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열심과 인간의 헌신이 만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몇 번이나(눅 113:34)’ 그 자녀들을 모아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아 예루살렘 성전은 황폐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도 거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을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의 일을 이루고자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하늘의 일’은 땅에 사는 우리들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우리가 헌신한다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던 일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찬양할 때,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시게 하려면,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한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땅의 일이 있고, 하늘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면 우리는 자신의 권력 지키기에만 혈안이 된 헤롯이나 빌라도처럼 하늘의 일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발 딛고 살아가시던 그 곳에서 하늘의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의 삶,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뒤로 하고 ‘하늘의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위선적인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땅의 일이만 지나치게 열심이고, 어떤 이들은 하늘의 일에만 치중합니다. 그러나 둘 다 아닙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듯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 일을 위해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일이 하늘의 일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땅에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듯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어떠할 것을 알기에 기쁘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균형있고 조화롭게 이뤄 가시는 삶을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창세전부터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 저마다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 소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늘의 일도 이루는 귀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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