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7주(20220220)
자비로운 사람
누가복음 6:27~38(창 45:3~11,15/ 시 37:1~11. 39~40/ 고전 15:35~38, 42~50)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분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 주간 내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꽃샘추위가 오는 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올해는 여느 겨울보다 추웠기에 해충도 적을 것이고, 봄에 피어날 꽃들의 색깔과 향은 더욱 깊을 것입니다. 추위에도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분들이 꽃과 열매에는 관심이 많지만,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과정에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결과중심주의 세태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결과물을 얻었을 때, 우리는 늘 그 안에 깃든 ‘그림자 노동’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시편 37편 1절의 말씀에는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치중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마음 자세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시 37:1).”
잘 되고 잘 살고 있는데, 왜 악하고 불의한 자들일까요?
과정이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세상일수록 온갖 불의한 일들을 통해서 잘 될 수 있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일수록 공정과 정의를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고, 시새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은 뿌리째 뽑혀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에 악한 자들이 잘되고, 불의한 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흔들립니다. 삶이 흔들린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이요, 고난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닻>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해 드립니다.
“파도 없는 날 /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 배가 흔들릴수록 꼭 잡아주는 닻밥.”
배가 흔들릴수록, 바람이 심할수록 닻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닻이 필요합니다. 그 닻은 바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하고 불의한 자들도 잘 되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때, 여전히 삶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도 같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꽉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일과 구약(창 45:3~11,15)은 형들의 시샘으로 이집트에 팔렸던 요셉이 형들을 만나 화해하는 장면입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사랑하던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누명을 써 옥에 갇힌 요셉의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견딘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14).”
고난의 시간들 속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닻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절망하지 않았던 요셉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팔아넘겼던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 자비로움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요셉의 신앙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짐으로 가능했던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기까지 수많은 고통의 강을 건넜고, 그 강을 건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는 자비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서일과 고린도전서 15장 35~38, 42~50절은 ‘몸의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몸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서 씨앗의 비유를 이야기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셨던 아버님이 어려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린 말이 없는데, 한 가지는 틀린 것 같아. 씨앗이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는데, 씨앗이 썩으면 싹을 틔우지 못하거든. 썩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바뀌는 거야.” 저는 최근까지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문장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씨앗은 언제나 열매보다 작다.’하는 문장입니다. ‘씨앗’에는 영양소가 있어서 맹아가 싹틀 때에는 씨앗의 영양소만으로도 생존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싹을 틔운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을 버리고 흙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죽은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처럼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씨앗의 입장에서 보면 싹을 틔웠으니 씨앗으로서의 소명을 다한 것입니다. 죽은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 혹은 썩은 것이 아니고 바뀐 것입니다. 변화된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을 보낸 씨앗들이 씨앗보다 더 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고난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서신서 성서일과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씀드린 성서일과에 복음서의 말씀을 축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남에게 주어라.”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인군자라도 행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요? 여러분, 이 말씀은 누구를 위한 말씀일까요? 우리의 원수, 미워하는 사람, 남을 위한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타인에 대해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동시에,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의 율법이 관례적으로 지켜지던 때였습니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 이것이 당시 통상적인 관례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아가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대의 이단아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한 시대의 이단아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 혹은 고난을 동반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서신서의 말씀대로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이어오는 비극과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원수가 아니라 생각만 달라도 미워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세상입니다. 이 얼마나 삭막한 세상입니까?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고,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인류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인류문명의 빛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빛이 되는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심판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혐오’가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미움, 정죄, 심판, 불평 같은 것은 ‘혐오’에게 아주 맛난 먹잇감이 되고, 혐오는 그런 먹잇감을 먹으면서 더 크게 자랍니다. 마음속에 크게 자라난 혐오는 맨 처음에는 타인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내 혐오는 혐오하는 당사자를 공격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매사에 짜증이 나고, 이런 마음은 바이러스처럼 주변에 급속하게 퍼집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공경합니다. 악순환의 되풀이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원수 갚는 일, 미워하는 일, 심판하는 일,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답답해도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정 부분 맡겨주고, 인간도 일정부분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것을 ‘소명’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맡기는 부분은 ‘은혜’입니다. 바로 이 소명과 은혜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났을 때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전적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삶을 바꿔주지는 않습니다. 기도하고 바랄뿐 아니라 땀 흘려 노력할 때, 하나님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나 미워하는 자에게 잘 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든 일이지만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원수를 미워하면,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면 악순환의 고리가 견고해질 뿐 아니라, 먼저 내 마음에 분노가 가득차서 나 스스로 넘어지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자비(慈悲)는 ‘크게 사랑하고 크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만 사랑하면 안 되고, ‘크게 사랑하고 크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자비입니다. 자비라는 한자 아래에는 마음 심(心)자가 받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비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통해 이뤄지게 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비로움은 우리의 일상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일상을 초월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일상에서 함께하는 가족, 친구들, 직장동료들은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전제조건은 ‘너를 사랑하라’입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라는 말씀의 전제조건은 ‘너를 미워하지 마라’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의 전제조건은 ‘너를 대접하라’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의 전제조건은 ‘자신을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연단의 과정이 있음을 잊지 마시고, 그때일수록 닻이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3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이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자비로운 분들 되셔서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라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일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세상은 불의한 자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실 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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