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6주(20220213)
복이 있는 사람은
시편 1;1~6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동장군도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로 한듯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들에는 물이 오르고 연록의 빛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지난주에 왕버들나무와 버들강아지를 보았습니다. 왕버들나무는 가는 줄기가 연록의 색으로 물들었고, 버들강아지는 어느새 꽃눈을 틔우고 강아지 꼬리같은 부드러운 솜털을 냈습니다. 이렇게 봄은 또 오는구나 싶습니다. 얼어있던 계곡의 물소리도 더욱 커지는 계절, 저는 성서일과 중에서 시편 1편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의 삶이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복 받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은 예레미야 17장 5~7절의 말씀입니다. 온갖 죄악에 빠져 악한 삶을 살아가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예언자의 아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악인은 저주를 받고,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데 유다는 지금 악인의 길에 서있다고 일갈입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악인은 사람을 믿고, 육신을 그의 힘으로 믿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인데, 유다의 운명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서신서는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의 말씀입니다.
서신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를 악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삶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쇠얀 키르케고르는 <이방인의 염려>라는 책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을 소개하면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하는 것은 ‘이방인의 염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의 염려’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이방인의 염려’, 즉 ‘먹고, 마시고, 입는’ 복만 구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염려’에 빠져 사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이들’이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누가복음 6장 17~26절의 말씀입니다. 이 역시 산상수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우는 자가 복이 있으며,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곁에 가난한 자가 있음에도, 우는 자가 있음에도, 주린 자가 있음에도 여전히 부요하고 배부르며 웃는 이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의 말씀은 제목 자체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의 주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일 성서일과 중에서 시가서의 시편 1편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들과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복 받는 삶’을 원하지만, 더 좋은 것은 ‘복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복 받는’이라는 표현은 아직 이뤄지지 않는 미래형이지만, ‘복 있는’이란,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이요, 이것을 아는 이들이 ‘복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있는 여러분 되시고, 그것을 알아 복 받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복의 개념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지적했듯이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구해야 하지만, 그것을 구하기 위해 땀을 흘려야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복의 개념’은 물질적인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을 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예수님 당시 사회적인 약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지병이 있는 이들을 죄인 취급하던 위선적인 종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만 복으로 구하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기복신앙이 되면, 우리는 이방인들보다도 구원받기가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일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인 것이요, 악인이기에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드리는 기도라면, 그런 기도는 재고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편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이란,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넷째,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물신에 기반한 기복적인 복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차이점이 느껴지시는지요? 기복신앙은 ‘받는 복’ 즉, 자기의 필요를 구하는 데에만 급급합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이미 받은 복으로 ‘복 있는 삶’을 살아감으로 일용한 모든 것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이 피해야할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도 알 수도 있습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먼저, 악인입니다.
‘악인들의 꾀’라는 문장을 통해서 악인들은 늘 선한 것으로 가장하여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양의 탈을 쓰고 이리 짓을 하는 것입니다. 오경웅의 시편사색에서는 이들에 대해 ‘無道한 자’라고 합니다. 도가 없는 사람, 마땅히 걸어야할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흔히, 흉악범죄를 저지른 이들이나 나쁜 일을 저지른 이들만 악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無道한 자’가 바로 악인입니다.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고,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의인이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있었는데 그 별명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래서 ‘길’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계획을 가지시고 각자에게 자기만의 걸어갈 길을 주셨습니다. 걸어갈 길이 어딘지 알고 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걸아가야 할 길이 어딘지 모르고, 다른 길에 서 있는 것을 ‘hata’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hamartia(죄)’라는 단어가 왔습니다. 죄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걷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경웅은 악인을 ‘무도한 자’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진리의 길, 걸어야할 길을 걷는 복 있는 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죄인’은 단지 인간의 율법에 따는 구분이 아닙니다. 이 역시도 ‘길’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죄인의 길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 따르면 ‘망할 길’이요, 오경웅의 시편사색에 의하면 ‘소인배들이 서 있는 길’입니다. 길이 아닌, 도가 아닌 길을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내어놓으시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21장 8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생명의 길이 있고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에 서 있는 이들이 복 있는 이들이요, 군자요, 의인입니다. 헛된 길, 사망의 길에서 서성이지 마시고 항상 생명의 길에 서 있는 여러분이시길 바랍니다.
셋째, 오만한 자입니다.

‘오만한 자’는 ‘교만한 자’나 ‘가볍기 그지없는 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이든 ‘오만’이라고 하는 단어는 ‘많이 배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니까 말이 많은 것입니다. 유진 피더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오만한 자’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배웠다고 입만 살았길 하나’로 번역했습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 즉, 사기꾼들의 입입니다. 좋은 말이라고 해도 말로만 앞서는 사람들이 오만한 자들입니다. 실행할 생각도 없이 표 한 장 얻겠다고 선거철만 되면 온갖 공약을 던지는 정치인들이 오만한 자들입니다. 지혜로워야 오만한 자들의 말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지 않고, 머리와 입으로만 산다면 오만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해야할 세 가지 유형의 사람,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우리가 피해야할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도 그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시편 1:2~3).”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듯이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범사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힘쓰며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하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은 그의 말씀에 젖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에 물이 올라 가지마다 연록의 빛이 더해가는 이 계절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거둠 기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하옵소서. 이렇게 살아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이끌어주심을 믿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사는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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