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11주(20211114)
종말론적인 삶
히브리서 10:19~25(삼상2:1~10, 단12:1~3,막 13:1~8)

평화의 주님께서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평화로운 삶을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입동이 지났다고 제법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서울은 겨울비답지 않게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야심한 밤에 천둥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내리면 많은 분이 마음을 졸인다고 합니다. 자연의 현상 중에서 홍수, 폭우, 천둥과 번개, 가뭄 등을 겪으면 일종의 두려움이 생깁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자연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은 샤머니즘으로 발전되었고, 인간보다 힘센 동물에 대한 두려움은 애니미즘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한성을 깨달은 인간은 인간 너머에 있는 ‘META’ 즉 형이상학에 대한 인식을 시작했고, 절대자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절대자는 유한한 인간을 넘어선 영원성을 가진 존재여야만 합니다. 이런 인식 끝에 유한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자각하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번 주 성서일과의 주제는 심판의 때, ‘종말론’에 관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12:1~3절은 ‘끝날’이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끝날에는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영원히 부끄러워할 자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2:1~10절의 본문은 ‘한나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10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라.”고 노래함으로써 역시 심판의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8절의 말씀은 ‘성전붕괴 예언’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성전붕괴’라는 제목 자체가 심판의 예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 본문으로 삼은 히브리서 10:19~25절에서는 심판의 때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 성서일과의 주제는 ‘심판 또는 종말’이라고 할 수 있고, 종말의 때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요, 종말론은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종말, 심판 이런 말을 들으면 두렵습니까, 즐겁습니까? 어떤 분들은 종말의 때는 의인에게는 기쁨의 때이므로 기쁨의 때라고 말씀합니다만,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본다면 심판의 때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18일 수능시험이 있습니다만, 제아무리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도 시험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면 은근히 시험이 기다려집니다. 빨리 시험을 마치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신앙 생활하신 분들은 심판의 때, 종말의 때가 속히 오길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하지만, 목사인 저도 종말의 때, 심판의 때가 두렵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쇠얀 케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듯이,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요, 감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일, 그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성서는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고 하셨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지언정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렵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말씀, 계시, 사탄, 죽음과 부활,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의 재림 등에 관한 말씀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순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오게 될 터인데,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종말’에 대한 오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2절에도 보면 종말론과 재림사상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곧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나태한 생활을 하고, 일하지도 않고, 무질서한 생활을 하고 문제를 만들기만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전히 사이비 종말론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에 제시된 ‘종말사상’은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미시적이고 문자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종말론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이비 종말론자들 때문에 기독교의 종말론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을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언저리만 빙빙 돌다가 쇠망의 길로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1992년 이장림의 시한부종말론에서 비롯된 휴거 소동을 위시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만희의 신천지, 안상홍의 증인들은 계시록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신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계시록을 읽는 수준은 저질코미디 삼류소설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들의 유혹이 쉽게 넘어갑니다. 이들의 모태는 기성교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992년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은 한국을 대표한다는 교회의 목사가 2000년 시한부설정을 한 것으로부터 기인했습니다. 시한부로 설정된 2000년에서 7년을 빼고 날짜를 계산해서 10월 28일이라는 숫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교회 곳곳에서 기도원에서 엉터리 예언이 횡행하고, 비성서적인 신유행위, 입신, 투시, 방언, 통역, 직통계시 등을 받았다고 우기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록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66권의 말씀이므로 모두를 균형있게 볼 수 있어야 계시록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만 집중하는 신천지는 괴변으로 일관하고 있고, 계시록에만 집중하는 설교자들 대부분은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2:18~19절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짜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것을 믿고, 깨어있는 신앙으로 오늘을 참되고, 바르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판과 종말은 두려움과 공포의 때가 아니라 소망의 때가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계시록은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늘(현재)을 참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관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가면, 당연히 소망찬 미래가 열리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붙잡혀서 오늘을 헛되어 보낸다면, 미래는 늘 두려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인 삶이란 무엇일까요?
종말론적인 삶이란, 떠날 때를 기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온전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목하면서, 지금 주어진 나의 모든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하시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떠날 때를 기억하면서 사는 생활방식을 갖고 살아가면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인생은 안개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알면, 영원히 살 것처럼 아등바등 유한한 것, 없어질 것, 놓고 가야 할 것들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말씀에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갈 지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덧붙여서 전해드리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5절까지의 말씀에는 심판의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때에는, 1)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3) 모이기를 권하여 더욱 힘써 모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의 말에 4)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5)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앞에서 제가 쇠얀 키르케고르의 문장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끔찍한 일이다.”를 소개하면서, 저 역시도 심판의 때, 종말의 때가 두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아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빠져들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끔찍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순간 회개할 수밖에 없고,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종말의 징조가 많이 보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것뿐 아니라, 과학자들도 인간이 지금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지구 종말의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인지 미혹하는 자들이 도처에 횡행하고, 재림 예수들이 넘쳐나고, 자신들이 구원의 방주가 될 터이니 세상 물질 다 바치고 방주로 들어오라고 하여 세상의 부와 권력을 쌓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제가 스스로 화가 나서 명이 짧아질 것 같고, 듣는 이에게도 덕이 되지 않기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곧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게 종말이란 개인의 죽음, 지구의 종말도 심판의 때요, 종말의 때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그 순간부터 ‘종말론적인 삶’을 요구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그날은 우리가 상상하는 아마겟돈, 지구멸망의 날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소망의 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을 맞이하려면, 1)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3) 모이기를 권하여 더욱 힘써 모이며, 4)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5)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꼭 사과나무일 필요는 없습니다. 앵두나무도 좋고, 모과나무도 좋고, 꽃 한 송이도 좋습니다. 그냥 오늘을 참되고 바르고 기쁘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성서일과 사무엘상 2장 10절에서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참되고 바르고 감사하며 살아가면, 종말과 심판의 메시지는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소망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참 소망과 기쁨을 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길 빕니다.

[거둠기도]
다시 오시리라 말씀하신 주님,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주님, 약속을 믿고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을 참되고, 바르고,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이비이단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하시어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님께서 주신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서로 사랑하며, 모이기에 힘쓰게 하옵소서.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의 뿔을 높여주시는 주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동행하시어 붙잡아 주셔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