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7(창조절 10주/ 성령강림후 24주)
모든 것을 걸어야
마가복음 12:38~44(룻 4:13~17, 왕상17:8~16, 히 9:24~28)

전부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난 시월 ‘본회퍼와 함께 하는 종교개혁의 달’로 삼고 5주간 본회퍼 목사님의 저작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다시 성서일과에 따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삼위일체력에 따라 창조절을 보내고 있고, 세계교회는 성령강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력을 따르든지 올해 11월 28일부터 대림절(Adventus)을 맞이합니다.
대림절은 ‘기다린다’는 뜻을 가진 절기로,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립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을 앞둔 성서일과는 ‘예수 그리스도’로 초점을 맞추어갑니다. 태초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십자가 고난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은 부활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교회로 이어지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는 공동체로 세워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어쩌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대충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걸고’ 이루신 일입니다. 독생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드리시기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걸고’ 우리의 역사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번 주 성서일과를 살펴보니 주 본문은 마가복음으로 삼았지만, 다른 연관본문들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로 주어진 본문은 너무 잘 알려진 말씀들이므로 설명을 드리면 다 아실 내용들입니다. 먼저, 룻기 4장 13~17절의 말씀은 과부가 되었던 모압 여인 룻이 우여곡절 끝에 보아스와 결혼하여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다는 내용입니다. 열왕기상 17장 8~16절의 말씀은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아합과 맞섰던 엘리야는 가뭄을 예고하고 아합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합니다. 그러나 가뭄이 극심해지면서 그릿 시냇가의 물이 말라버리자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를 찾아갑니다, 사르밧 과부도 극심한 가뭄에 먹을 것이 떨어졌고, 마침 통에 남은 밀가루 한 웅쿰과 병에 남은 기름으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요구에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주자,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은 화수분처럼 밀가루와 기름을 내었다는 이야깁니다. 히브리서 9장 24~28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2장 38~44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신 후, 가난한 과부가 가난한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으므로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예물을 드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서일과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첫 번째는 ‘과부’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단 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은 물론이고, 사르밧 과부나 가난한 과부 모두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바치셨고, 사르밧 과부도 마지막 음식이 될 밀가루와 기름을 전부 바쳤습니다. 가난한 과부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떤 사이비종교에서는 이런 본문들을 신도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이 말씀에서 ‘모든 것, 전부’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공통적인 단어 ‘과부’와 ‘모든 것’에 대한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이하에는 십계명을 위시하여 다양한 법들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종에 관한 법, 폭행에 관한 법, 배상에 관한 법, 공평에 관한 법, 절기에 관한 법 등을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명기법전의 기본이 되었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끄는 근본정신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근본정신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미쉬파트(공평)와 츠다카(정의)’입니다.
그들이 430년간 노예생활을 겪었으며, 40년간 광야에서 떠돌았고, 강대국에 짓밟히며 식민지 생활을 했기에 구약은 약자 옹호적이고 강자비판적인 내용이 지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자 중에서도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는 약자 중 약자였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다시 한 번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공평과 정의는 강자들을 위한 공평과 정의가 아니라 약자들의 공평과 정의였던 것입니다.

부여, 고구려 시대 우리나라에도 ‘형사취수제’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대가 있습니다.
유대 민족에게도 이런 제도가 있었고,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보다 엄격하게 이 법이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사취수제란,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자는 것입니다. 후에 아이를 얻으면 그 아이는 형의 아이로 호적을 올리고, 형의 유산을 형수와 아이 몫으로 넘겨주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사회에서 ‘형사취수제’는 일종의 ‘과부 보호법’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를 취할 동생이나 친족이 없거나 동생이 자신의 유산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거부함으로 과부 혼자 살아야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고대 근동의 법전에는 이자 금지조항이 없었다고 합니다.
고리대금업이 횡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는 언제나 고리대금업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아모스서 2장 6절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파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고리대금업’이죠.
어떤 분은 당시 돈에 대해서는 20%의 이자가, 곡식에 대해서는 33.3%의 이자가 붙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근거로 20%, 33.3%로 이자액을 산출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요즘 불법대부업체들의 횡포를 생각해 보면 ‘신 한 켤레 값’으로도 가난한 이들이 팔리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팔리면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고대근동에서 여인, 게다가 과부가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결국,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매춘을 통해서 먹고 살 수밖에 없었고 이것도 젊은 과부나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룻기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모압 여인 룻을 살피신 것에 대한 이야기요, 이방여인인 것도 모자라 과부였으며 가난했던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다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아들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다윗을 낳고, 낳고, 낳고....., 아브라함으로부터 42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서일과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 밑바닥, 아무 힘도 없는 약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을 불러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 가시겠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룻이나 사르밧 과부나 가난한 과부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아들과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밀가루와 기름,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로마의 동전으로 환산하면 한 고드란트, 룻은 가난한 이방 여인이지 과부,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은 죄인으로 몰린 초라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아들과 굶어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밀가루와 기름을 모두 엘리야를 위하여 드렸고,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계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예수님은 또 어떻습니까?
“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을 때,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에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화수분처럼 밀가루와 기름이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가장 큰 예물을 드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을 때,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을 때, 부활의 영광과 인류에게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냥, 대충해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고,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일도 ‘모든 것을 걸고’해야 겨우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모든 것을 걸고’해야 겨우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대충해서 얻어지는 것이나 거저 얻어지는 것은 쉽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거저 누리는 은혜들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걸고’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결코 값싼 것일 수 없고, 값비싼 것이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달음박질 하듯이 뒤 돌아보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가야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더하여 빌립보서 3장 14절의 말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를 드립니다.
무슨 일이든 ‘모든 것을 걸고’하십시오.
모든 것을 걸어야 겨우 얻을 수 있고, 그래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 그 길은 ‘모든 것을 걸어야만’ 걸어갈 수 있는 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걸고’하십시오. 모든 것을 걸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방향성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점, 푯대로 삼고 걸어가십시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대충대충 하지 마십시오. 진실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시면, 사르밧 과부가 가뭄 중에서 부족하지 않은 밀가루통과 기름병의 기적을 체험한 것처럼,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처럼,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은 것을 바친 것과 같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걸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거둠기도]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도 차별하지 않으시며, 그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가진 것은 서로 다를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귀한 날,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하시고, 특히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에는 대충 혹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도와주셔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옵소서. 고난 중에도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옵소서. 진실한 마음을 받으시고, 우리의 전부를 기쁘게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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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e5Roy2RzuEE
연결된 설교영상은 실황이 아니라, 비대면으로 예배하는 분들을 위한 영상입니다.
미리듣기나 주일예배 후에 반복해서 들으시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