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회퍼와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5)
복종과 믿음
누가복음 9:57~62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아멘.

시월을 ‘본회퍼와 함께 하는 종교개혁의 달’로 삼았는데, 벌써 다섯 번째 시간이요, 마지막 주일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에 대해 좀 더 깊이 아시고자 하는 분들은 『옥중서신, 나를 따르라, 성도의 공동체』를 직접 읽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책에서 진액을 뽑아 전해드리고자 했지만, 전하지 못한 소중한 말씀들이 더 많습니다.
오늘은 본회퍼 목사님의 대표작에 나오는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복종과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목양실에 나와 라디오를 틀었더니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노래를 들으며 시월의 마지막 날을 실감합니다. 가수 이용이 10월 31일 하루에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로 얻은 저작권료 수입으로 일 년을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10월 31일이면 많이 들려오는 노래입니다. 가수 이용의 노래 중에서 ‘잊혀진 계절’보다 음악성이 더 높은 노래도 있겠지만, 그를 대표하는 노래는 ‘잊혀진 계절’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단어, 평생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그 단어는 ‘복종’입니다. 물론, 이보다 더 아름다운 단어와 심오한 단어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복종’이 모든 신앙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제자들을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복종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망설이며 주저주저했던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복종’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믿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복종’이라고 합니다.

‘복종이 먼저일까, 믿음이 먼저일까?’하는 질문을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종의 행위가 먼저 있었으므로 ‘복종은 믿음에 선행한다’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또한,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종’의 뜻은 단순히 ‘명령을 따른다’는 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걸어 나오는 행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종이 무엇인지는 복종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복종은 질문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복종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보다 복종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를 통해서 해석할 여지도 없이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록 중에서 해석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말씀을 순서대로 다섯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형제에게 노하지 마라(마 5:22).
2. 구제함을 은밀한 중에 하라(마 6:4)
3.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마 6:15)
4.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
5.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이런 말씀을 읽으시면 그냥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로하고 따랐습니다. 세리 마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세리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즉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걸어 나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가족관계에 얽매여 살아가던 사람이 그 관계를 끊고, 즉 ‘옛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생활에서 걸어 나오지 못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은, ‘옛것을 뒤로하고 포기하는 것’이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매이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후, 여러분의 생활양식이 바뀌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여서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고 계십니까?
“아멘!”하신 분들은 복종을 잘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네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고민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 예수님께 매여서 살아가지 않고 소망하기만 한다면, 아직은 복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복종’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쉽게 “아멘!”하여, 복종을 값싼 복종으로 바꿔버리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 복종했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하는 생활방식을 하나 둘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 부르심과 복종 사이의 틈(눅 9:57~62)

제가 지난 4주간 강조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through), 그리스도 안에서(in)’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매개로, 나와 너 사이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종과 부르심’ 사이에는 어떤 ‘틈’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복종하지 못했던 이들은 공통적으로 “내가 먼저……을 한 후에 따르게 해주십시오.”요구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무례한 요구가 아니라, 율법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내 가족과 작별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복종과 부르심 사이에는 틈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왜 성서를 읽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디에서 듣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이나 징조나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들으려면 먼저 성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서 읽기를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부르심과 복종 사이에 큰 강을 두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신구약 성경 어느 장을 읽더라도 성경 전체와 그 한 장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의 뿌리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서를 묵상하지 않으면 부르심과 복종 사이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틈’을 없앨 때,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들을 포기하고 그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셔서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쟁기질을 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행운처럼 모내기 전 논에서 소가 모는 쟁기를 몰아본 적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였는데 아버님이 사내가 쟁기질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쟁기질을 하다 요령을 알려주시고는 쟁기질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를 몰며 쟁기질을 했는데 삐뚤빼뚤 난리가 아닙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소 엉덩이만 보고 소를 쫓아가기에도 벅찼던 까닭입니다. 아버님이 웃으시면서 “소 엉덩이를 바라보지 말고 저 앞산에 있는 나무를 기준점으로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잠깐의 경험이었지만 이때 저는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지는 일만 바라보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중학교 시절 저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저의 기준점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기준점이 있었기에 엇나갈 가능성이 언제나 주위에 있었음에도 크게 엇나가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자처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앞을 바라봐야 하고, 소 엉덩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준점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의 고삐를 쥐고 적절한 곳에서 고삐를 채어 소를 멈추게 하고, 방향을 바꾸게 해야합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소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를 통제해야 합니다. 소를 통제하려면 앞만 바라봐야 합니다.

여러분, 지나간 일들에 붙잡혀 살아가지 마십시오. 좋은 일이든 아픈 일이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라는 노랫말처럼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복종과 믿음’은 과거형도 아니고 미래형도 아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복종과 믿음’을 하는 이들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분들 되셔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기도]
지금도 “나를 따르라!”말씀하시는 주님, 그 명령에 너무 익숙하여 불순종하면서도 복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이제 ‘with코로나’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 주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 주님의 제자로 바로 서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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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iyAa9MQqUks
미리 설교문을 읽고, 설교영상을 보고 예배에 참여하시면 주일 선포되는 설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본 회퍼와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총 5가지 주제)'은 이번 주까지로 마감하고, 다음 달 부터는 성서일과에 따른 설교로 대림절까지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