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4주/성령강림후 18주
기억과 망각
민수기 11:4~6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한가위를 맞이하여 고향 길 잘 다녀오셨는지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고향 방문을 하지 못하신 분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가고 싶어도 분단의 장벽으로 인해 고향에 갈 수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향’이 왜 그립습니까?
추억 때문입니다. 추억은 다소 좋은 이미지로 남기 마련이고, 거기에 살짝 무용담 같은 것이 곁들어지면서 본인도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추억은 아련하고 그립습니다. 그리고 추억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기억’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추억도 기억의 일종이지만, 어떤 기억은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망각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만일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루쉰의 자전적인 단편소설 <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은 연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형은 연날리기는 쓸데없는 놀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형은 연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했는데, 어느 날 동생이 창고에 앉아 연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형은 동생이 만들고 있던 연을 빼앗아 밟아버립니다. 그때가 8살 어릴 때였는데, 이날 이후 형은 그 일로 동생에게 늘 죄책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형은 동생에게 잘못을 구합니다. “그때, 연을 빼앗아 밟아버려서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그러나 동생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동생은 기억에 없으니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하지 못하고, 형은 용서를 받지 못하니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망각해도 피해자는 기억하는 법인데, 루신의 <연>에서는 거꾸로 나옵니다. 형은 용서받을 수도 없으니, 이제 그 사건을 망각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억하면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억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게 도 하지만, 고통을 수반한 기억은 지나치면 그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망각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억과 망각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기억으로 인한 고통으로 삶이 망가지지 않을 방법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어 진리라는 단어 alatheria가 망각의 강 Lathe에 어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민수기에는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애굽에서 노예 생활 끝에 광야로 나왔습니다. 광야 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광야에서 홍해의 기적뿐만 아니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마라에서 쓴 물이 단물이 되는 기적과 매일 밤, 만나가 내리는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이 대략 기원전 1454년이었으니, 오늘 우리가 읽은 민수기의 말씀은 광야생활한지 4년(B.C. 1450년 경) 정도가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탐욕을 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도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탄을 합니다. 한탄을 할 뿐 아니라 거짓기억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이건 그 당시 왕들의 생활이지 자유인들도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노예로 살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가짜뉴스까지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불평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온 이후, 그들의 생존의 근거가 되었던 만나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그들은 기억해야할 것을 망각했습니다.
병행본문 시가서 시편 124편의 말씀과 연결해보면, 자신들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처럼, 이집트에서 광야로 나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중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병행본문 서신서 야고보서 5장 13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불평할 때가 아니라 기도할 때였습니다. 광야를 떠돎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인 만나가 매일매일 내린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요, 찬양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탐욕에 빠져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감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일과를 통해서 우리가 새겨야할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입어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웃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하지만,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은혜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광야의 시간에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떠났지만, 광야에서 훈련을 받는 시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에덴의 동쪽으로 상징되는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야를 떠돌고는 있지만, 노예의 삶과는 다른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길은 100만 명이 천천히 이동을 한다고 해도 거리상으로 한 달이 걸리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들에게는 430년 동안 이집트의 생활, 노예근성을 떨쳐버리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훈련의 시간은 무려 40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우리는 훈련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잊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불평하지 마시고, 고난의 때라면 기도함으로 고난을 이겨내십시오. 이런 분들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때에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들, 후회만 남아 기억하면 자신을 힘겹게 하는 일들을 잊어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많은 분들의 경우는, 남들은 다 잊어버린 일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것이 때론 죄책감으로 작용을 하고, 때로는 피해망상으로 빠지게 하여 그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아련한 추억에 있지도 않던 이런저런 영웅담이 가미되어 추억을 장식하듯이, 나쁜 기억에도 있지도 않던 이런저런 것들이 추가되면서 한 사람의 삶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인권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서 ‘지나 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너무 후회하지 말고, 그냥 노래하고, 꿈처럼 여기고, 앞을 향해 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입니다. 저는 과거의 일에 대한 태도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런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은 난데없이 이집트에서 있었던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온전한 기억이 아니라, 이것저것 있지도 않던 기억들이 혼합된 가짜기억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서일과 민수기 11장 5절의 말씀입니다.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새번역).”
여러분, 과거의 기억 중에서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훌훌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일의 노예로 살지 마시고, 붙잡혀 살지 마십시오. 그래야 지난 갈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삶을 의미있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 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광야와도 같은 세상을 살면서 고난이라는 파도를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크든 작든, 누구든 ‘고난’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바람과 같아서 잘 이겨내고 극복해 내는 이들의 삶의 뿌리를 더욱 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가뭄이고, 하나는 바람이라고 합니다. 가뭄에 시달리고 바람에 시달린 나무들만이 뿌리가 깊어져 거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도 이러할진대 우리 사람들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성서일과 야고보서 5장 13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해야 불평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감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찬양으로 이어지고, 찬양하는 삶은 기쁜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억과 망각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기억으로 인한 고통으로 삶이 망가지지 않을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고난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터널 끝의 빛줄기가 서서히 보이는 듯도 합니다. 설령, 그 빛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전해 줍니다.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 찬송할 이유와 감사의 이유를 찾으시고 회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사냥꾼의 올무에 갇힌 새와 같은 삶을 살아가던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누구나 고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불평에 빠지지 말고, 기도함으로 우리의 삶을 기쁨의 삶을 바꾸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기억해야할 일들과 망각해야할 일 사이에서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비대면예배를 위한 영상은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오전 7시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WKZvYW-sO-g
설교영상 /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설교영상만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EI8zD-OUFV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