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성령강림 후 5주] 관습의 울타리를 넘어

  • 관리자
  • 2021-06-27 10:00:00
  • hit2405
  • 222.232.74.74

관습의 울타리를 넘어
마가복음 5:21~43
(20210627)

 

■ 습관과 관습



관습(慣習)이란,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지면서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을 말합니다. 관행, 일반관행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사회에서 형성된 관습이 국민일반에게 법규범으로서의 확신을 한 사회가 관습, 관행에 얽매이게 되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습관(習慣)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이며,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행동 양식이고 반복하여 수행함으로 고정화됩니다. 습관은 신체적 행동 뿐 아니라, 생각 등 정신적, 심리적 경향도 포함합니다.




미국 최고의 자기계발 전문가로 꼽히는 제임스 클리어(James Clear)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아주 작은 것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삶 전체가 변했습니다. 매일 1%씩 달라졌을 뿐인데 삶 전체가 변했습니다. 100번만 반복하면 그게 당신의 습관이 되고, 무기가 됩니다.”라고 합니다. 습관에는 좋은 습관이 있고,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 1%가 나쁜 습관이라면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1%가 좋은 습관이라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1%의 좋은 변화


1%는 겨자씨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마가복음 4:30~32).”



여러분, 좋은 영적인 습관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제가 2019년 4월에 좋은 영적습관과 관련한 말씀을 나누면서 이런 제안을 드렸습니다. ‘하루 1회 성경말씀 묵상하기, 하루 5가지 감사의 내용적기, 하루 세 번 감사표현하기’를 습관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돕기 위해 <숲의 위로>라는 감사노트를 만들어서 나눠드렸습니다. 제가 제안한 대로 하신 분들은 많은 기쁨을 느끼셨을 줄 압니다. 아직, 습관이 되지 않으셨다면, 오늘부터라도 다시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숲의 위로> 여분이 조금 있습니다. 1%의 좋은 변화,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꿉니다. 1%의 변화를 사소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은 아주 작은 악이 우리의 삶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은 1%의 좋은 변화를 통해 삶 전체를 풍성하게 가꿔가는 지혜로운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성서 일과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일과에는 두 가지 기적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고 딸을 고쳐주시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마치 유명한 연예인이 나타나면 팬들이 환호하며 몰려드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고 했으니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내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입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은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제 재촉하여 가려고 하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기별하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이제 더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시고 얼른 와서 장례절차나 준비하십시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시어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 나거라!”하시니, 그 소녀도 살아났습니다.



■ 관습의 울타리를 넘어

이 이야기에는 당시 관습법에 어긋나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병 걸린 부정한 사람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시체’를 손으로 만진 것입니다. 정결법을 중시하던 유대인들에게 여인의 행동은 매우 부정한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에서 몸에서 피가 흐르거나 고름이 흐르는 사람은 물론이요, 그와 접촉하는 사람이나 사물 모두 부정해 진다고 했습니다. 만일, 당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었다면 아마도 여인에게 불 같이 화를 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제의적 금기를 넘어서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관습화된 정결법과 제의법의 울타리를 넘어, 고통당하는 여인의 아픔을 치유해 주시고, 죽었던 딸을 살림으로 사랑하는 딸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는 관습이나 일반적인 관행이나 생각들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앙인의 삶은 법의 테두리 안에 갇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선한 역사를 이뤄가던 선구자들의 삶은 대부분은 관습법을 깨뜨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관습법을 지키고자하는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분 중 한 분이셨습니다.



■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예수님은 가련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시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분노하시고,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로 나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열 두 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백방으로 병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재산만 다 날리고, 그의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혈루증’은 당시 정결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로 여겨져서,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릴 수도 없으며, 죄인 취급을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옷자락 스치는 것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니 죽지 못해 사는 치욕의 세월을 열두 해 동안 살아온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기 위해 가시던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서 몰래  주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순간,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직감했습니다. 성경은 여인이 자신에게 이뤄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떨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공포나 막연한 두려움이가 아니라, 모세가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느낀 경외심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 일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지체됩니다.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좀 서둘러 가야할 터인데 예수님은 마냥 느긋합니다.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십니다. 온통 야이로 딸의 병세에 마음을 빼앗겨 조급한 제자들은 퉁명스럽게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아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대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바쁜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멈추어 서서 사람들을 가만히 둘러봅니다. 그러자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저간의 사정을 아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고친 것은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그녀의 병이 나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 고하고 나니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의 씨는 ‘내 안에’ 있으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믿음의 씨앗’을 깨워주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모든 씨앗 중의 작은 겨자씨가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지만, 동시에 ‘구원’은 이렇게 ‘작은 믿음’을 품고 살아갈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말씀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 그 믿음을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을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구원받은 여러분이시길 바랍니다.



■ 달리다굼 – 아이야, 일어 나거라!

여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하십니다.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공포’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당장에게도 ‘믿음’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믿으라!”, 이 말씀은 ‘믿으면, 기적을 행할 것이다’라는 말씀이요,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시지만 그 출발은 각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들을 보면 모두가 ‘믿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을 베푸실 능력이 있는 예수님이시라도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베푸실 수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기적 속에 살아가면서도’ 믿음이 없으면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잠 18:12)’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회당장에게 딸의 죽음 알린 이들이나, 딸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을 비웃습니다. 만일, 힘이 있다면 강압적으로 억누를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십니다. “아이야, 일어 나거라!” 아침에 잠든 아이를 깨울 때 어머니들이 사용하는 아람어입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아이만 깨우기 위한 말씀이셨을까요? 믿음 없이 살아가는 이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이들, 그래서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는 이들에게 “달리다굼!” 외치시는 것입니다.

1%의 좋은 습관, 1%의 믿음, 그릇된 관습을 넘어서고자 하는 1%의 용기가 예수님 앞에서 구원의 기적으로, 달리다굼으로 성취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