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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4주] 나는 다윗인가, 골리앗인가?

  • 관리자
  • 2021-06-20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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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넷째주일(20210620)
나는 다윗인가, 골리앗인가?
사무엘상 17:32~49



이번 주는 성령강림 후 네 번째 주일이며, 6.25민족 화해주일입니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고착화하였습니다. 이후, 남과 북은 서로 대립하며 외세의 힘을 빌려 자주성을 상실한 식민지 민족으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꿈꾸지만, 그 꿈은 요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 수난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 한민족은 ‘수난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독립국가에 사는 것 같지만, 남한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눈치나 보면서 살아가고, 북한은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가장 친한 동맹관계인 일본이, 우리 민족을 36년이나 강탈했던 일본이 독도를 도발하고,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발적 친일파’들이 지금도 넘쳐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정신 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섣부른 흡수통일도 낭만적인 평화통일도 이 나라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해 주고 서로 왕래하고 교류하면서 쌍방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유로이 남과 북을 오가면서 동질성을 회복하면 그때서야 ‘하나의 조국’을 이룰 가능성이 열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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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서일과는 많은 분들께 익숙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성서의 본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에서는 주로 ‘약한 것도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정도로 사용되고, 기독교 내에서는 ‘약하고 어린 다윗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아무리 강한 골리앗 같은 장수도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 더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사항이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약자는 강자들의 횡포에 억눌리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적나라한 현실을 너무 많이 체험했고, ‘약육강식’의 논리를 진리처럼 배운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골리앗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내재화되어 ‘약한 자에게는 무례하고, 강한 자에게는 비굴한 삶’을 처세술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무엇이든 이길 수 있다.’는 희망 사항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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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경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 가나안에 정착하고자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강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인데, 고대 가나안 지역의 지중해 연안의 다섯 도시 연맹체였습니다. 블레셋은 바알(Baal, 아스다롯(Astarte), 다곤(Dagon) 등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이스라엘은 혼합종교를 영적 간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250번 정도 언급되었지만, 단 한 번도 긍정적으로 묘사된 적이 없었습니다. 블레셋과 관련하여 성서에 나온 사건 중 우리도 잘 아는 사건은,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과 들릴라’이야기에서 삼손이 무너뜨렸던 신전과 관련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실로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탈취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 곁에 두었다가 신상이 무너져 버리는 사건을 겪기도 합니다. 이들이 서로 적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신교와 유일신이라는 종교적인 충돌도 있었지만, ‘지중해 연안’을 지배할 수 있는 요충지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문제가 더 컸습니다. 블레셋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도발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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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은 지루했습니다. 사십여일 동안 각 진영에서 대치하면서 말싸움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의 전쟁은 곧 신의 대리전 형식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블레셋의 신과 이스라엘의 야훼의 싸움이요, 전쟁에서 이기는 나라의 신이 최고의 강력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싸움 내내 상대방이 섬기는 신을 조롱하면서 도발합니다. 고대사회의 전쟁방식 중 하나는 각 진영에서 장수 하나가 나와 겨루어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대적할 용사가 없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용감무쌍함을 보여줬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있었지만, 이번 싸움에서 지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위협에 빠질 것이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중해연안을 지배하지 못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될 터이고, 경제적인 곤란은 곧바로 국가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골리앗과 겨루어 반드시 이길 용사를 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냥 그의 용기에 감복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승산이 있다고 판단이 되어 그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승산이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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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으로 2미터 90정도 되는 거인입니다. 게다가 그가 걸치고 있는 갑옷의 무게는 오천 세겔로 57kg정도입니다. 거기에 놋으로 만든 각반과 창과, 창날과 쇠 육백 세겔이 추가되었으니 최소한 60kg이상 되는 것을 몸에 짊어졌습니다. 다윗과 싸울 때, 골리앗은 방패든 사람을 앞세우고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의학적으로 몸집이 거구인 사람들은 ‘말단비대증’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 말단비대증이 가져오는 문제 중 하나가 시력저하의 문제라고 합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골리앗이 말단비대증의 영향으로 시력이 약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단 방패든 사람을 앞세우고 나왔는데,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 안내자가 필요했을까요? 그들의 진영 에베스담밈과 에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 중간에서 싸울 터인데,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내려오다 돌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거구에다가 60kg이상 중무장한 골리앗은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에야 비로소 다윗이 ‘홍안의 소년’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골리앗의 시력은 분명히 안 좋았을 것입니다. 거구인데다가 각종 투구 등으로 중무장을 했고, 시력도 좋지 않으니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전차부대, 육탄전을 벌이는 보병부대, 화살이나 창 혹은 물매를 던지는 오늘날의 공병에 해당하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어디에 속했을까요? 예, 육탄전을 벌이는 보병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홍안의 소년임을 확인한 후에도 “내게로 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맞붙어 육탄전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다윗이 달려 나오면서 물맷돌을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상상하지 못했던 보병과 공병의 싸움이 전개된 것입니다. 



다윗의 물맷돌은 그냥 작은 돌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돌의 위력은 초속 35km, 45구경 총알 정도의 위력으로 180m 거리에서도 맨 살에 맞으면 불구가 되거나 뼈가 부러지고, 급소에 맞추면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물맷돌 병사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을 지키면서 물맷돌 던지기를 수도 없이 연마했던 것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무모한 싸움이 아니라, 사실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육탄전에는 최적화된 골리앗이었지만, 시력이 약한데다가 제 몸도 무거운데 거기에 각종 무구로 무장한 골리앗은 다윗 앞에서 물 위에 앉아있는 오리 신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물매 한 방을 맞고 기절했거나 사망을 했고, 목이 잘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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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에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개역)’, 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자’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동으로 양떼를 돌보며 잔뼈가 굵은 자입니다. 군대문화 속에서 잔뼈가 굵은 골리앗과 목동으로 자란 다윗이 비교되지요. 다윗에게 골리앗이 갖춘 각종 무장들은 39절에 보면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사울처럼, 골리앗을 이기려면 각종 무구로 무장해야 한다고 하지요. 오늘날 언어로 바꿔서 말하면 학위, 자격증, 스펙 이런 것들이 되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로 무장하지 않고 골리앗을 이깁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물맷돌’이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것저것 남들이 쌓는 스펙을 다 쌓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깊은 믿음과 자기만의 물맷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삶이 거추장스럽지 않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입던 옷, 평소 양을 지킬 때 사용하던 지팡이, 물맷돌로 사용할 매끄러운 돌 다섯 개가 골리앗과 맞설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에 보면,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돌멩이 하나를 고를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도하면서 하나하나 골랐겠지요. “하나님, 이 물맷돌이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섯 개를 골랐는데, 하나만으로 이겼습니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다섯 번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소비되는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이뤄지는 기도가 있기 위해서는 소비되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부족했지만, 목동으로서 자신이 맡은 일을 다 했습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기어이 그 입에서 양을 구해냈고, 짐승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하면 그것을 쳐 죽였다고 했으니, 스스로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수금을 타는 것은 경지에 다다라서 사울이 악령에 씌워 힘겨울 때에 연주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을 치유할 정도였습니다. 연주로 사람의 병을 치유할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했겠습니까? 그저 양 떼를 지키는 것을 넘어 스스로 수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과 육의 조화를 위한 끊임없는 수고가 있었기에 그는 수많은 시편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삶은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골리앗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었기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이에게 사울이 그랬듯이 군복을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히라고 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열심히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일도 그런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 골리앗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과 같은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당시 양 떼를 지키는 수많은 목동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들 다윗 같았을 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낙오자들도 많았을 것이고, 대충대충 일하면서 언제나 그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며 시간만 축내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 끊임없는 수련을 했고, 기본적으로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을 만든 것입니다.


그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갈 때 뭐라 합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삶에 대한 자세와 이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기도할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는 사람은 골리앗 세상에서도 승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기도하고, 의지하는 이들을 붙잡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저는 다윗이 무작정 하나님만 믿고 골리앗에게 나아갔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장점과 골리앗의 단점을 분명히 보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반드시 승리할 것을 알았기에 나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중무장한 골리앗처럼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삶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기도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다윗의 삶과 믿음을 본받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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