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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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3주] 겨자씨 믿음과 하나님 나라

  • 관리자
  • 2021-06-13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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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셋째주일(20210613)
겨자씨 믿음과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34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새겨지기를 기원합니다.
'소소한 기쁨’이나 ‘작은 감사’를 할 줄 알아야, 기쁨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나 기쁨 혹은 만족감은 어느 날 갑자기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씨앗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천천히, 고요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실패로 이끄는 일도 ‘소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작은 것’을 작다고 무심히 지나치지 마시고,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된 마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갈림길에서 첫 번째 발걸음이 목적지를 바꾸듯, 아주 작은 것이지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왜 비유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마다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 비유’도 모두 ‘하나님의 나라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일을 ‘비유와 은유’로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는 크게 보면 세 가지 이유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대놓고 비판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조롱하려는 목적입니다.
이것은 은유의 언어가 가득한 요한계시록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초대교회를 향한 압박이 너무 심한데 대놓고 비판했다가는 아예 초대교회가 뿌리째 뽑혀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뿔이 열 달리고 머리가 일곱인 짐승(계 13:1)’ 혹은 ‘붉은 용’ 등으로 표현합니다. 유신독재와 군부독재가 통치하던 우리나라도 1970~80년대에 ‘은어’가 많았습니다. 직접 대놓고 비판할 수 없으니까 은어로 절대 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팍스로마’-로마의 평화-는 곧 신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신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직설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군사력으로 무장하여 로마제국을 전복해 다윗왕국을 재현하려는 젤롯당이나 무장혁명세력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은 한 마디로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팍스로마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언어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경우에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도덕경 1장에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명제처럼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고 설명될 수 있는 존재라면 하나님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인간의 언어에 의해 규정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존재 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도 존재하지만, 비유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직접화법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갑작스럽게 본의 아니게 이해되면 너무 큰 충격에 빠질 것이므로 비유를 듣고 깊이 생각하는 이들만이 그 비유의 뜻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일일이 또다시 비유를 해석해 주신(막 4:34)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이 규정한 하나님 나라와 그를 이루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인간이 규정한 하나님 나라는 한국에서 고작해야 ‘휴거’를 주장하던 사이비 집단의 양산, 죽어서 가는 천국에 매몰된 신앙인들을 양산했을 뿐이고, 세계적으로는 전쟁과 폭력의 진원지였을 뿐입니다. 왜, 이런 결과로 나타났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나라인데 인간이 제멋대로 규정해 놓고는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하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하는 삶


 

콩을 심을 때는 세알을 심어야 한답니다.
한 알은 하늘을 나는 새의 몫으로, 한 알은 흙에 사는 곤충들의 몫으로, 한 알은 씨를 뿌린 자의 몫으로 심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도 지난봄에 ‘콩 세알 정신’으로 화분에 콩을 세알씩 심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새도 흙의 곤충도 요즘에는 콩을 먹지 않는지, 심은 대로 싹이 다 나왔습니다. 한 알만 싹이 터도, 두 알만 싹이 터도 감사한 일인데 세알 모두 싹을 틔웠으니 감사합니다. 요즘은 꽃이 피고, 콩꼬투리도 맺히고, 커가기 시작하는 데 지켜보는 재미가 좋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묵상을 합니다. 

제가 할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은 ‘콩’을 선택하고 정성껏 심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저 지켜보면서  과정에 참여할 뿐입니다. 콩 줄기가 올라오면 타고 올라갈 줄을 매어주고, 콩이 익으면 따 먹고, 나중에는 종자를 남기고, 이듬해 잊지 말고 다시 파종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거둘지, 열매가 얼마나 실할지는 그냥 하늘에 맡길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심고, 가꾸고, 추수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완성하시지만,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히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8,29)’는 말씀을 통해서도 씨를 뿌린 사람이 추수의 기쁨에 동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씨를 뿌리고, 가꾸고, 관심을 두는 일은 우리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하려면,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씨앗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보시고, 그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 밭, 중심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보시는 맑은 눈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실 때마다 그 사람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일깨워 싹트게 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실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신 말씀은 바로 그 사람 마음 중심에 있는 ‘잠자던 씨앗’을 깨우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는 어떤 씨앗이 들어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씨앗이길 바랍니다.

 
■ 소소하고 작은 것들의 소중함


하나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씨가 자라는 과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연의 변화는 요란하지 않습니다. 너무 천천히 변해서 그냥 그대로인 듯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당장 결실을 맺지 않으면 안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천천히 자랍니다. 그리고 ‘씨앗’처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소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묵상했습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작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와 만족과 기쁨은 생명 있는 씨앗이요, 이것들이 싹을 틔우고, 이삭이 되고, 곡식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자라나는 단계를 건너뛰지 않습니다.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28절에 누구나 아는 상식에 속하는 말씀,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 과정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고요하게 이뤄집니다.



씨앗은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씨앗은 땅이 자라게 하지만 농부의 손길도 필요합니다.
한자 ‘쌀 미(米)’가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논에 88번을 드나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열 십’ 자 아래위로 ‘팔’자를 붙여놓은 형상입니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도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저는 이런 교훈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신 분들입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88번 논을 오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자라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겨자씨의 비유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렇게 상징으로 사용된  ‘단어’에 대해서 ‘사실관계’를 입증하겠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생활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혁명도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람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깃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도 중요한 상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슨 거창한 일을 한 사람들만 품는 곳이 아니라, 작은 공중의 새들 같은 보통의 존재들도 들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겨자씨를 뿌려보니 상추씨보다도 작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겨자씨를 뿌릴 때 씨눈을 위로 향하게 심어야만 한다면 심을 수 있을까요?
씨앗은 어떻게 심겨도, 씨눈이 거꾸로 흙에 파묻혀도 싹은 바로 납니다. 씨눈이 거꾸로 박혔다고 싹이 흙을 향해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싹은 항상 하늘을 향해서 자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우리 마음 중심에 받아들이면, 우리의 마음 밭에 제대로 뿌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싹을 틔우게 되는 법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 밭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밭을 갉아 엎어 옥토로 만드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의 씨앗이므로, 반드시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자로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밭에 받아들이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적으로 외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작은 것, 소소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기쁨과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런 삶이 바로 씨앗을 파종하는 일이요, 파종하면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겨자씨 믿음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한 주간 동안 이전에는 감사하지 않았던, 이전에는 기쁘지도 않았던 작고 소소한 감사와 기쁨의 씨앗들을 깨우셔서 파종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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