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성령강림후 1주] 성령의 사람은?

  • 관리자
  • 2021-05-30 10:00:00
  • hit2952
  • 222.232.74.74

성령강림후 1주 / 삼위일체주일
성령의 사람은?
이사야서 6:1~8
 


지난주부터 성령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저는 ‘성령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성령’에 대한 오해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에 대한 오해는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인데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 ‘삼위’란 하나님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표현한 세 가지 모습으로 성부, 성자, 성령인데 이것이 ‘하나’라는 겁니다. 왜 하나냐 하면, 각기 다른 세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김 목사로도 불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빠로 불리고, 아내에는 ‘남편’으로 불린다고 해도 제가 하나이듯,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 성자 하나님으로, 성령 하나님으로 불린다고 해도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실 때, 보혜사 성령께서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았습니까?”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아주 유치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말씀,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등 성경은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이 내재해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하나님의 숨결’을 간직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하나님 대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라는 개념에는 인간이라는 종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삼라만상이 포함되며, 특히 ‘이웃사랑’의 출발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웃’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기적 같은 삶의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성령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의 위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했으니, 기원전 739년경이었습니다. 

웃시야(여호와는 나의 능력)는 유다의 10대 왕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집권초기에는 영토 확장과 농업 개발, 국력강화에 힘을 쏟았고 하나님의 일에도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강성한 유다 왕국을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역대하 26장에 따르면, 교만해진 웃시야가 제사장의 직무까지도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려 8년 동안이나 고생하다 죽습니다. 정직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너무 열정적이었던 나머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선을 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령인지 악령인지 구분도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만 최고라고 여깁니다. 저는 얼마 전 성령 충만해서 환상을 자주 본다는 어느 목사님과 사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암 수술을 앞둔 교인에게 한다는 말이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검은 그림자가 교인을 덮치려 해서 자기들이 물리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수술 잘 끝나면 자기들 덕인 줄로 알고 감사헌금 많이 하라는 이야기니 이게 무당이거나 사이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환상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교인을 겁박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저도 제주도 종달교회에서부터 알게 된 권사님 한 분이 계신데 지금은 신안에 있는 섬에 살고 계십니다. 아무튼 기도를 엄청나게 많이 하시는 분이신데, 제가 봐도 신기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일 년에 두어 번씩은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곤 합니다. “목사님, 별 일 없으시죠 잉. 제가 기도하는 중에 목사님이 보여서 전화드렸서라요.” 느낌이 좋았다거나 혹은 안 좋았다거나 하면서 안부를 묻는데,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냥 그 정도입니다. 제가 그 권사님이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지 않고, 신기가 많다고 한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정도입니다. 성령은 이런 것과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열정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정이 너무 강한 나머지 교만해져서 제사장들의 직무까지도 넘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병에 걸려 8년 동안 고생을 하다 죽게 되는데, 웃시야 왕의 사촌동생으로 추정되는 이사야는 그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당시 유다는 겉으로는 번영하고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사라졌고, 부유한 자들의 향락과 사치는 심해졌고 신흥강대국 앗시리아는 호시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상황, 절망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이사야는 찹찹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웃시야와 이사야를 비교하며 대조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합니다. 교만했던 웃시야가 자기 의에 빠져 제사장의 업무를 우습게보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병에 걸렸다면, 이사야는 자신의 죄인임을 깨달아 알았고(5절), 자신의 죄를 인식함으로 제단의 숯불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7절). 그리하여 웃시야는 성전에서 쫓겨났지만(대하 26:21), 이사야는 성전에서 주님의 환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성령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실체를 분명하게 봅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사 6:5a)".

이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20절의 말씀 -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 을 상기하게 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신의 얼굴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순간, 빛에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듯 자신의 본 모습을 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b)”

입술이 부정한 자, 즉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의 모든 것은 입술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입술이 부정하다’라는 고백은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고백은 이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을 받았다는 이들은 자기 의에 빠져서 자신이 죄인임을 간과하고 살아갑니다. 죄의식에 빠져 살아가는 것과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을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한순간도 죄를 쌓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식은 두려움에 빠져 살아가게 만들지만, 죄 인식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사악한 종교는 죄의식을 부추겨서 두려워하게 하지만, 건강한 종교는 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돌아보십시오. 누군가의 희생, 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의식주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지만, 누군가는 결핍한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일상생활로 인해 배출되는 각종 오염물질들...세세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죄를 안 짓고 살아갈 수 없고,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죄를 쌓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권리라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니 모든 것이 은혜요,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겸손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순종, 겸손, 섬김 등의 바탕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사람은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죄인임을 자각했을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부집게로 집은, 타고 있는 숯을,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사 6:6~7).”

제단의 숯불을 입에 대어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사야가 제단의 숯불을 취해서 입에 댄 것이 아니라, 스랍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죄 사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목사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죄 사함을 구할 뿐이지,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들 역시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은 죄 없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 사함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할 때 시작됩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질 않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의롭게 산다고 한들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로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칭의’에 의한 것입니다. 칭의란,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의 바탕에는 바로 죄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식에 빠져 살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는 인식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래야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셋째,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6:8).“

아주 유명한 고백이지요. 성령의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사야서의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독백처럼 말씀하시는데 이사야가 응답을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백처럼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독백을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늘 말씀하십니다. 일상에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응답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일상에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령, 유별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 받은 사람이요, 일상에서 성령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