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넷째주일(2021년 4월 25일)
임마누엘! 선하신 목자
시편 23:1~6

부활절 넷째주일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임종할 때 유언으로 남긴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임마누엘이다.” 그러니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는 이야깁니다.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살았던 거장이 남긴 유언-“가장 좋은 것은 임마누엘이다.”-은 너무 간단합니다. 진리는 본래 단순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진리로부터 멀면 멀수록 복잡하고, 이런저런 군더더기가 붙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삶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는 것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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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종종 생각해 봅니다.
좋은 신앙을 가지려면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참 스승은 좋은 길로 인도하여 양육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 3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참 스승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명 상품을 만드는 메이커들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상품을 만듭니다. 자기의 이름이 걸렸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서 제품을 만들고,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품질도 좋습니다. 품질이 좋은 만큼 부가가치도 높아지는 것이지요.

시편 23편은 시편 중에의 시편이라고 불리며, 시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많이 애송되는 시이기도 합니다. 대학시절 영문학시간에 가장 처음 암송 했던 시도 시편 23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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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인데, 젊었을 때 쓴 시가 아니라 다윗이 황혼기에 접어들었을 때에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전원시’입니다. 황혼의 삶을 살아가는 다윗, 그의 말년은 그다지 평온하지 못했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했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기도 했고,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도 했습니다. 아마도 시편 23편에 표현되었듯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다 채워지지 않은 상황, 뭔가 뒤틀려가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다윗은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자신의 궁핍함을 근원적으로 채워주실 분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밖에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함없는 풍족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좋은 스승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기에, 좋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장 좋은 스승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심으로 좋은 신앙을 형성하시고 지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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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3편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도 친숙한 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할 나위가 없이 친숙한 시입니다. 그런데,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시편 23편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인지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곁에 늘 있으니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무 친숙해서 시편에 들어있는 소중한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시편23편은 다윗의 황혼기에 쓰인 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4),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5)“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은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양처럼 무력한 존재일 뿐 아니라, 원수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는 처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경험하던 이런 상황은 사실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암, 치매, 우울증, 이혼, 사업실패, 가정폭력, 가난 이런 암울한 그림자들이 우리 곁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도 다윗이 그랬듯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듯이 우리에게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양면성 가운데 있습니다.
목자도 있고, 어두운 그림자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을 ‘광야’라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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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있는 양떼에게 꼭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맹수가 어슬렁거리고 다가와도 눈앞에 와서야 겨우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가축 중에서 멍청하기로 유명해서 그냥 혼자 내버려두면, 반드시 위험한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맹수가 있는 곳으로 가거나 절벽으로 가서 위험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목자 없이 양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양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했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저 적당히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맹수가 가득한 곳이요, 결핍이 가득한 곳이요, 어두운 사망의 그림자가 위협을 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양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은 제로입니다. 우리 삶의 현실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이 광야에서 여전히 살 수 있는 것은 목자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도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선하신 목자이신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셔야 합니다. 광야의 삶을 살아갈 때가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어두운 그림자’에 짓눌려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게다가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현혹합니다. 아마도 이것을 깨달은 웨슬러는 ”가장 좋은 것은 임마누엘이다.“라는 유언을 남겼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임마누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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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도피성 제도가 있습니다.
어떤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살인죄를 저지를 사람이라도 도피성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도록 방지하고,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입니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사막에도 ‘광야의 황금경건’으로 불리는 환대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범죄(주로 살인죄)를 저지르면 사막으로 도망합니다. 사막으로 도망간 범죄자는 잡힐 때까지 추격을 당합니다. 사막은 도망자의 도피처요, 집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위협과 죽음이 일상적인 끔찍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막의 환대법’입니다. 그 환대법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신의 손님’으로 목자의 천막에 초대받아 음식 대접을 받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원수들 앞에서 식사 대접받을 때에도 목자의 천막에서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법을 지키려면 사실 목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살인자나 추격자 모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인자가 목자를 해할 수도 있고, 추격자가 목자를 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막의 환대법을 지키려면 목자도 위험한 상황에 던져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그러니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시고 환대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셨으니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시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보호해주셨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이렇게 지켜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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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어떻습니까?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새 길이 열렸습니다. ‘내 영혼이 소생케 되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광야와도 같은 세상,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을 하나님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선한 목자가 아니라 거짓 목자들을 따르며, 언제 도축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시편 23편의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임마누엘! 선하신 목자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하나님이 채워진 만큼 세상의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갈 것이요, 원수들이 해하려고 달려들지라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지켜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