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세 번째 주일(장애인주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4~21
혹시 뉴스를 통해서 어떤 사건에 대해 자주 보도되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고 ‘지겹다, 그만해라’고 생각하거나 말한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데 그렇게 지속적으로 보도되는 것은 아직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겪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자 노력하는 중이며, 더는 자신들과 같은 피해를 겪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들로 인해 만일 나 혹은 우리 가족이 비슷한 피해를 당했을 때 그들이 먼저 당한 아픔으로 인해 제정된 ‘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지겹다’가 아니라, 감사해야할 일이요, ‘지겹도록(?)’ 보도가 되어도 고쳐지지 않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일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이자 장애인주일입니다. 장애인 주일설교를 준비하면서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던 문장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이었습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하여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참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백주대낮에 행하는 뻔뻔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나 사회가 ‘더는 뻔뻔한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법’이 그것인데, 사실 법의 출발은 지배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만, 최소한의 피지배층인 약자들을 위한 법을 포함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지배를 지지해주어야 할 약자들의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최소한의 약자들을 위한 법령도 끼워 넣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권법이며, 근대사회 이후 하나 둘 제정되는 사회안전법입니다.

현존하는 세계최초의 성문법은 우르 남무(Ur-Nammu)법전으로 기원전 2100~2050년 사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법전이 번역되기 전인 1952년까지는 ‘함무라비법전’이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르 남무는 총 27개조의 법령이 제시되어 있는데, 1.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되어야 한다. 23. 어린이를 납치하면 수감되어야 하고 15쉐켈을 치러야 한다. 는 두 항목을 제외하면, 거의 지배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입니다. 300년 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282개조로 이뤄졌는데 ‘동해보복법’이라고 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에 의거하여 법을 집행합니다만, 거의 모든 법 역시 지배 권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한 법들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나 노예들에 관한 것도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돈이 없어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반면 부유한 자들은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뭔가,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법이 제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법’이라는 것 자체가 지배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지배 권력을 위한 통치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소설가 정세랑씨는 <피프티 피플-50명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관련된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 그거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이 만든 거야. 몇 백 년 전부터 그랬다더라. 먼 나라들에서도 언제나 그랬다더라.”
안전법은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 하나 둘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소설가 정세랑 씨가 간파했듯이, 안전법은 언제나 큰 희생 뒤에, 그 유가족들의 지난한 싸움을 통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제정된 우리 사회의 ‘민식이법, 장자연법,
‘윤창호법’같은 것들도 그것입니다.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전태일을 위시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었고, 장애인들을 위한 법도 수많은 장애인들의 죽음을 통해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법들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법은 ‘사후약방문’으로,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유족들이 아픔을 겪은 후에야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슬픔에 대해서 여전히 가혹하리만큼 참혹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저는 육체적인 장애뿐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주 심각한 정신적인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장애란, 신체적, 정신적 손상으로 인한 사회적인 차별로 인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신체적인 장애인들 중에 11% 정도만 선천적이고 후천적 장애인이 89%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정신적 장애인의 경우는 후천적 장애인이 90%를 넘어갑니다. 이렇게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 자신 주변의 세상과 소통하거나 특정 활동을 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장벽 때문에 선진 국가에서는 ‘장애인’에 관한 세세한 정책들을 만들 때 ‘단어 하나’도 신경을 씁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장애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disabled’나 ‘disability’를 사용하지 않고 ‘a person with disability’라고 합니다. 이런 형태를 ‘people-first Language’라고 하는데 ‘나는 우선적으로 사람이 알려지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사람’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어에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비칭이 많습니다.
병신,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병신은 일반적인 장애인, 벙어리는 언어장애, 귀머거리는 청각장애, 장님은 시각장애인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개역개정판에서도 이런 내용의 일부를 받아들여 ‘절뚝발이’를 ‘다리를 저는 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최근에 부끄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올해부터 주간 기독교라는 매체에 꽃과 관련한 신앙에세이를 매 주일 한 꼭지씩 연재하는데, 어느 날 집필주간이 전화를 했습니다. 장애인 목사님이 제 글을 보고 항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 에세이내용 중에 ‘장님’이라는 표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장애인들이 비하라고 여겨지는 단어를 그냥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구나 생각하며 ‘사과문’을 내고 ‘시작장애인’으로 수정 공고를 냈습니다.

제 신학교 후배 중에서 각별하게 지내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 딸 중 큰 딸이 선천적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여려서부터 저를 큰아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졸업연주회에 가지 못했지만, 사단법인 ‘한국발달장애인문화예술협회 아트위캔’에 올라온 연주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연주도 잘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도 없고, 자신이 전공한 피아노로 학원하나 차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전공한 것으로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해야겠는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야 좋은 나라일 터인데 사방이 벽으로 에워싸인 상황입니다. 평생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가 그 딸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 어쩌면 이것이 장애인들이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 지려면,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사회의 장벽이 너무 높아서 ‘한숨’만 나온다면, 그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와 가족의 모든 기도가 번번이 무의미해지는 사회라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말씀 중에서 15절의 말씀에 뭐라 하십니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 중 하나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도 “위로를 받을 것(마 5:4)”입니다.
이 땅에 슬퍼하는 자들, 애통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미얀마에서 군부쿠데타에 맞서 싸우는 이들, 기아선상에서 죽어가는 아이들, 오염된 물밖에는 먹을 것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이들, 공장식 축산으로 항생제 덩어리가 된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동물들, 기후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멸종되어가는 동식물들, 자본주의 맘몬의 경쟁체제 속에서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들, 가진 것이 없어 억울한 일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들, 이 모두가 이 땅에서 슬퍼하는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런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일,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막 14:7)”하는 말씀이 있으니 그냥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장애인들이 겪는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인해 우리의 내적인 장애도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모두 장애인입니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없다고 비장애인이 아니라, 신체가 건강해도 생각이 그릇되었으면, 슬퍼하는 자들과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장애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은 우리의 장애를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3월 10일 자에는 <법구경>에 나오는 문장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산다. 그러므로 학대하거나 살생하지 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산다.”
학대하고 살생하는 것은 꼭 직접적으로 가해를 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하기는커녕 조롱하거나 무관심한 것도 학대하고 살생하는 행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대하면 결국, 그들 자신 속에 깃들어 사는 자신을 학대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해하는 자들까지도 축복하고(14),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15), 낮은 데 처하며 지혜 있는 척 하지 말고(16), 선한 일을 도모하고(17), 모든 사람과 화목(18)할 것이며,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19), 원수도 사랑하라(20).”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왜 원수도 사랑해야 할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존재 속에 너 자신이 깃들어 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땅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슬퍼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영의 눈을 뜨면, 그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는 자들이 보이면, 그들과 함께 우십시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5:4).” 주님의 위로하심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