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종교개혁의 달 01] 침묵하시는 하나님

  • 관리자
  • 2026-10-04 11:00:00
  • hit1547
  • 219.251.41.124

엔토 슈사쿠의 <침묵>과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20261004)

침묵하시는 하나님
시편 22:1-3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사건을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9주년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루터나 칼뱅을 생각합니다.
면죄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같은 말도 떠올립니다. 물론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509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생각한다면 종교개혁은 역사 공부에 그치고 맙니다.
종교개혁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이 개혁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올해 종교개혁의 달에는 조금 특별한 책 한 권과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가 1966년에 발표한 소설 『침묵』입니다.
 

■ 『침묵』의 배경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고 신자들이 늘어나자 1614년 도쿠가와는 그리스도교를 금지하고 혹독하게 박해하고 가콜릭 선교사를 추방하기 시작합니다.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예수나 성모의 모습을 새긴 판을 밟게 하는 ‘후미에’도 사용했습니다. 그것을 밟으면 배교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밟지 않으면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탕 고문이나 수형을 통해서 공포감을 조성하고 배교를 종용했습니다.

그 무렵 로마교황청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일본에서 33년이나 선교하며 존경받는 포르투칼예수회 신부 페레이라가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인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로드리고는 스승의 행방도 확인하고 박해받는 일본 신자들을 돕기 위해 동료 가르페 신부와 함께 몰래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기치지로라는 일본인을 만나 도움을 받습니다. 기치지로에 대해서는 다음 주 메시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 침묵하시는 하나님


로드리고는 일본에 도착해서 놀라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신부도 없고 제대로 된 교회도 없는 상황에서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부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합니다. 고해성사를 받고 성찬을 갈망합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킵니다. 

로드리고는 감동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 보게 됩니다.
관리들은 신자들을 붙잡아 배교를 강요합니다. 바닷가에 기둥을 세우고 사람을 묶어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내버려두기도 합니다. 수형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이상 그렇게 고통 받다가 죽습니다. 좋ㅂ은 구멍에 거꾸로 매달고 귀에 구멍을 뚫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가며 죽게 하는 고문을 자행합니다. 고통당하며 부르짖는 신음소리를 듣게하여 아직 배교하지 않은 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로드리고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새들은 지저귀고,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됩니다. 그런데다가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침묵』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로드리고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박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이 당신을 믿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제주도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종달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교육관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해안가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교회까지 바닷물이 날아와 푸르던 잔디와 텃밭에서 애써 가꾸던 채소들이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 염분의 습격을 피한 채소들도 장대비에 짓물러버렸습니다. 자연의 힘을 이토록 생생하게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본당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태풍이 더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속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교우들의 가정뿐 아니라 종달리 마을 전체를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새벽, 교회를 둘러보고 동네로 나갔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여명의 빛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빛 아래 드러난 마을의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홀로 사시던 여든이 넘은 권사님 댁으로 갔습니다. 지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슬레이트 지붕을 받치던 앙상한 골조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서 권사님은 비에 온 몸이 젖어 망연자실한 채 덜덜 떨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을 교회로 모셔가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붕이 사라진 자리, 앙상한 골조 너머로 붉은 새벽하늘이 보였습니다. 그 하늘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밤새 태풍이 휩쓸고 간 참혹한 흔적 위로,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권사님은 밤새 이 고생을 하셨는데 지켜주시지도 않고, 이제 와서 약 올리듯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라니요?'




그러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여에 걸쳐 피해를 복구했습니다. 이제는 권사님도 두 다리 뻗고 편히 주무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에 바다에 나가 톳을 따오시다가 덤프트럭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얼마나 참혹했던지 목사인 나에게조차 권사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비참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권사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순박하게 살아오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오신 권사님이 태풍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겨우 복구를 마친 뒤 그렇게 생을 마감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권사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고통의 원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아름다운 새벽하늘을 이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것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로드리고가 일본의 바닷가에서 느꼈던 분노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로드리고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박해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죽어 가는데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하늘은 아름답고,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침묵하시는가?”
로드리고에게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그분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도하면 길을 열어주시고, 선하게 살면 지켜주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정의를 세워주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병은 낫지 않고, 간절히 구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의를 위해 싸웠지만 악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이러해야 한다’고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모습일까요?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모습을 개혁하는 일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편 22편의 시인은“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면서도 놀랍게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해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는데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고통 받는 인간에게 정답을 알려주시거나 전지전능한 힘으로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셔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함께 외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학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경험들을 함께 경험하시는 분이시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고난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했던 로드리고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침묵 속에 나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응답하셔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시간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이 들리지 않고, 아무리 기다려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때에 우리의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시편 기자는 대답을 얻기 전에 먼저 부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십자가의 예수님도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그렇게 외쳤습니다.


■ 믿음이란?


믿음이란 하나님의 침묵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침묵이 견디기 어려워 하나님께 항의하고, 원망하고, 때로는 의심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랬고, 십자가의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침묵하시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왜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질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가지고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언젠가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침묵하시는 것 같았던 하나님이 사실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고 계셨다는 것을.



 

그런데 로드리고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자신의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의심하던 로드리고는 이제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주에 나누겠습니다.


■ 거둠 기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부재하시는 것 같은 순간에도
“나의 하나님!”을 부르는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경험들을 함께 경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종교개혁의 달에 나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귀한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