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넷째 주일(20260927)
숲은 나무보다 크다
시편 139:1-6

창조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 주에는 시편 104편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창조세계를 함부로 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순을 돌아보았습니다.
둘째 주에는 시편 8편을 통해 ‘천천히 바라보기’를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바라보면 더 깊이 보이고, 더 깊이 보면 관계가 보이며, 관계가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19편을 통해 ‘천천히 듣기’를 생각했습니다.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온 땅에 통하는 창조세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천히 보고, 천천히 들은 것이 전부일까?
■ 숲길을 걸으며

저는 숲길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숲길을 걷다보면, 숲이 주는 향기도 좋지만, 숲에 안겨 살아가는 수많은 동식물들을 만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어려서는 이맘때가 되면 가까운 숲으로 올라가 도토리나 밤을 따고, 버섯 같은 것들을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육지에 있는 숲길 중에서는 오대산 선재길을 좋아하고, 섬에 있는 숲길 중에서는 ‘사려니 숲’을 좋아합니다.
사려니 숲은 ‘신령한 숲’이라는 뜻을 가진 숲입니다.
숲 초입에는 커다란 삼나무가 우거져있고, 높이 솟은 삼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보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걷다보면 삼나무 숲이 끝나고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으름덩굴, 제주조릿대 등등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는 풀밭이 펼쳐져 있고, 풀섶에는 작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이끼가 있고, 벌레가 있고, 새가 있고 노루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해가 숲으로 파고 들어올 때 그 곳에 서면 신비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터지고, 비 오는 날에는 빗방울이 저마다 크기가 다른 나뭇잎에 부딪치며 서로 다른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숲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숲에는 곧게 자란 나무가 있는가 하면 비틀어진 나무도 있습니다. 싱싱하게 자라는 어린나무 곁에는 죽어가는 고목도 있습니다. 땅에는 떨어진 낙엽과 썩어가는 나무가 있습니다. 못 생긴 나무도 있고, 향기가 별로인 꽃도 있고, 심지어는 해충도 있고, 독초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곧게 자란 나무를 보며 숲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만 숲이 아닙니다.
꽃도 숲이고, 잡초도 숲이고, 짐승과 벌레도 숲이고, 죽어가는 고목도 숲입니다.
모두가 다 숲의 일부가 되어 숲을 이룹니다. 숲에서는 죽은 나무조차 도 숲 밖으로 밀려나지 않습니다. 쓰러져 썩어가면서 벌레의 집이 되고, 버섯과 균류의 자리가 되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을 살립니다. 숲은 아름다운 것만 모아놓은 곳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아름다운 것과 볼품없는 것,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하나가 숲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하나도 숲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 139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 고백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갑니다.
“내가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4절에서는 “내가 혀를 몰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면 많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종일 나를 지켜보시며 잘하는지 아닌지 감시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장부에 적어놓았다가 언젠가 벌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까닭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감싸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앞에도 계시고 뒤에도 계십니다. 내가 볼 수 없는 앞날에도 계시고, 이미 지나가버린 나의 시간에도 계십니다. 내가 잘한 것뿐 아니라 부족한 것도 아시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아시면서도 나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피시는 것은 감시하기 위한 눈길이 아니라 품어주는 앎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시인은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참 중요한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살피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아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 앞뒤로 감싸주신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그 모든 깨달음 끝에서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말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아는 것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짜 앎’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조금 깨닫고 나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배운 신학, 내가 이해한 성경 해석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여기까지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분이어야 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틀렸어.”
신앙고백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가두는 울타리가 되어버립니다.
숲에서 나무 몇 그루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분명 숲입니다.
내가 본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순간, 참된 고백도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과 잘못 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소중합니다.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도 신앙적인 확신에 차서 “이게 하나님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구원이다”라고 단정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생과 구원과 십자가는 몇 마디 말로 가둘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 해도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는 숲의 일부를 바라보는 사람일 뿐입니다.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도 있고, 잡초도 있습니다. 새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햇빛이 드는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새 생명이 돋아나는 곳도 있고 오래된 생명이 죽어가는 곳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숲입니다.
그래서 숲을 오래 걸을수록 함부로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숲은 이런 곳이야.” 라고 물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걸었던 숲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나무와 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봄에 숲을 걸었던 사람과 겨울에 걸었던 사람이 경험한 숲은 다를 것입니다. 나무를 바라본 사람과 땅에 엎드려 작은 이끼를 바라본 사람이 들려주는 숲 이야기도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 내가 보지 못한 숲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가 본 숲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됩니다.
“아, 숲이 내가 본 것보다 더 크구나.”
자기만 옳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도 그렇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도 그렇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고백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하나님 이해가 다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도 끊임없이 성찰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바로 틀렸다고 단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차후에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는 시간도 갖겠습니다.
저에게 숲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숲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숲보다도 크십니다. 숲이라는 은유로도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도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모두 소중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이고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과 교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학보다 크시고, 우리의 교리보다 크시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는 모든 언어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확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말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확신이 깊어질수록 겸손도 깊어져야 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숲의 모든 것을 알아야 숲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숲속의 모든 나무 이름을 몰라도 됩니다. 모든 풀과 벌레의 이름을 몰라도 됩니다. 땅속에서 어떤 생명의 작용이 일어나는지 다 설명하지 못해도 됩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숲에 안겨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립니다. 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옵니다.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압니다.
“내가 지금 숲 안에 있구나.”
하나님도 그런 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압니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을 압니다.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백합니다.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번 창조절에 우리는 창조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생각했고, 천천히 듣는 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 가지를 더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들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고백이 거짓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다만 그 고백으로 하나님을 가두지 맙시다. 내 고백을 잣대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맙시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가 걸어보지 못한 숲길을 걸어왔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숲은 나무보다 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보다 크십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고, 그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다 설명하려 하지 맙시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크신 신비 안에 안겨 살아갑시다.
그리고 시편 기자와 함께 겸손히 고백합시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 거둠 기도
우리를 아시고 앞뒤로 감싸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신비 앞에 겸손하게 하옵소서.
서로 다른 이들의 고백에 귀 기울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품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