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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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3주] 천천히 듣기(slow-listening)

  • 관리자
  • 2026-09-20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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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셋 번째 주일(20260920)
천천히 듣기(slow-listening)
시편 19:1-14

 


창조절 첫째 주일에는 시편 104편을 통해 창조세계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매주 고백하면서도, 창조세계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주일에는 시편 8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멈추어 서서 천천히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천천히 바라보면 더 깊이 보입니다. 더 깊이 보면 관계가 보이고, 관계가 보이면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천천히 듣는 것(slow-listening)입니다.
 

■ 말(언어)의 홍수 시대


우리는 참 많은 소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출판 불황이라고 하지만, 하루에도 200종 가까운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텔레비전은 24시간 쉬지 않고 방영되고, 휴대전화를 열기만 하면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정치인도 말하고, 종교인도 말하고, 유튜브에서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합니다. 말과 언어의 홍수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말은 넘쳐나는데 서로의 말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말도 많고, 그럴듯한 말도 많고, 신앙적인 말도 많지만 그 말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보다 갈라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많은데 소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오늘의 디지털 사회에서 소통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역설적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오래 견디며 듣지는 않습니다. 듣는 동안에도 이미 판단하고, 대답할 말을 준비합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경청은 사라지고, 연결은 많아졌지만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 시편 19편의 세계


그런데 시편 19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정반대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말이 많은데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조세계는 말이 없는데 통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참 역설적입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그런데 소리가 온 땅에 통합니다.
하늘도, 구름, 밤하늘의 별도, 나무도 꽃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어떻게 들었을까요? 말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온 몸으로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랫동안 천천히 바라보았고, 천천히 바라보며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는 그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대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통하는 것, 말하지 않아도 그가 전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말입니다.

 

■ “나 여기 있어요”


제가 야생화를 열심히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식물도감에 있는 제주도의 야생화를 전부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꽃을 찾아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꽃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만나고 싶은 꽃을 만나려고 천천히 걸으며 풀숲을 바라봅니다. 지쳐서 그냥 돌아서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곳을 바라보면, 제가 찾던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면 참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꽃이 말을 할 리 없는데 마치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 여기 있어요.”
물론 실제로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 작은 생명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풀숲에서 작은 꽃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경청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준비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경청이 아닙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 말 뒤에 어떤 아픔이 있는지,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경청에서 중요한 태도 가운데 하나가 ‘판단 중지’​입니다. 판단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판단을 잠시 미루자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천히 듣는다는 것은 판단을 잠시 미루고 그 사람의 말이 내 안에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그다음이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창조세계의 소리도, 성경의 말씀도, 이웃의 신음도 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도록 듣는 것, 그것이 경청입니다. 경청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통해 나도 변화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며 듣는 것입니다.
 

■ 땅이 부르짖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감추려 했지만 땅이 그 소리를 감추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습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가 말합니다.
인간이 형제의 죽음을 감추어도 피가 침묵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위기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폭염과 가뭄, 산불과 홍수, 녹아내리는 빙하와 사라져가는 생명들. 그것을 단순히 자연현상 하나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들은 인간이 살아온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경고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듣지 않으니 땅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말하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생명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처럼, 상처 입은 창조세계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것이냐?”
 

■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들리는가


시편 19편은 흥미롭게도 7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하늘과 궁창, 낮과 밤을 노래하던 시인이 갑자기 여호와의 율법과 말씀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앞에서는 말 없는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전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혼을 일깨웁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통해서도 우리가 누구인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장을 많이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그 말씀 때문에 영혼이 소생하고, 조금 더 지혜로워지고, 마음이 기쁨을 회복하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이 받는 상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상이 크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나중에 하나님께서 따로 주시는 보상으로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미움에 휩쓸리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판단하기 전에 들어주는 것, 창조세계의 신음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이고 상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시편 19편은 마지막에 아주 익숙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나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씀으로 만든 복음성가를 많은 분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흔히 ‘내가 하는 말을 받아주십시오’하는 청원의 기도로 읽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전체를 따라 읽다 보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말을 듣고,
밤의 말을 듣고,
땅의 말을 듣고,
상처받은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충분히 들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야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라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듣지 않고 하는 말은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천천히 들읍시다.
대답하기 위해 듣지 말고 이해하기 위해 들읍시다. 판단하기 위해 듣지 말고 그 사람의 아픔을 알아차리기 위해 들읍시다. 창조세계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 마무리

창조절 첫 주에는 창조세계를 제대로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둘째 주에는 멈추어 서서 천천히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천천히 듣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천히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길가의 작은 꽃이 말합니다.
“나 여기 있어요.”
상처받은 이웃이 말합니다.
“내 이야기도 좀 들어주세요.”
신음하는 땅이 말합니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말을 듣고, 땅의 신음을 듣고, 이웃의 아픔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충분히 들은 후에 우리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상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마지막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 거둠 기도
창조주 하나님,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이웃의 아픔과 창조세계의 신음과 주님의 말씀에 천천히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충분히 듣고 말하게 하시며, 우리의 말이 상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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