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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13주] 나는 누구인가?

  • 관리자
  • 2026-08-2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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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13주(20260823)
나는 누구인가?
마태복음 5:13-16




사람에게는 저마다 좋아하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일이 있고, 시간이 나면 자꾸 마음이 가는 일이 있습니다.
돈이 생기지 않아도 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합니다. 오히려 하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보입니다.

나는 무엇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가?
나는 어디에 돈을 쓰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재미있는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는가?
무엇을 생각할 때 가슴이 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에도, 책을 볼 때도, 산책을 할 때에도, 신문을 읽을 때에도 ‘설교’에 어떻게 적용할까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 사진 찍는 일인데, 설교의 소재가 되는 사진을 찍으면 기분이 좋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해야할 때면, 기꺼이 다른 지출을 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하는 일 가운데 목회와 상관없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화분에 물을 주는 일도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목사이기 때문이고, 현재 목사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다.
자기 정체성이 그 사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에 시간을 쓰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 싶다면, 지금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고, 기꺼이 지출을 하면서도 아깝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시간을 내는 것, 집중하는 일, 즐거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자기정체성에 맞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믿음 좋은 사람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이미 소금이다.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닮지 못했습니다. 이미 빛이지만 때로 어둡고, 이미 소금이지만 때로 맛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이 되기 위한 삶’이라기보다 ‘이미 된 존재답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미 소금이기에 소금답게 살아가고, 이미 빛이기에 빛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어느 사이에 소금답게, 빛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평생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자신이 가장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야 하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직함이 있다고 저절로 정체성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정작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많은 마음을 쏟는 것이 목회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어느 순간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삶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 길을 가는 것이 본인에게고 교인들에게도 좋은 것입니다.
제 신학교 동기들 중에 10%정도만 목회자가 되었는데, 처음 신학교에 들어올 때에는 모두 목사가 되겠다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디자이너가 되기도 했고, 목수가 되기도 했고, 농사꾼이 되기도 했고, 사회운동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목사가 되지 않았어도 그 일들을 통해서 목사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에서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죠.


예수님은 소금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인데 짠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인데 소금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신앙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이 이것인지 모릅니다. 이름은 신앙인인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맛이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함은 있는데 목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붙었는데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정체성은 사실 직함보다 중요합니다. 정체성은 내가 무엇이라고 불리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모두가 목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에서 자식들을 위한 서원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말은 거의 언제나 한 가지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목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이것이었죠. 사실, 하나님의 일은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는 것인데 말이죠. 저 역시 어머니의 서원기도 속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목회자로 부름 받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길이 목사가 되는 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목사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빛과 소금 같은 교사가 필요하고, 빛과 소금 같은 의사가 필요하고, 빛과 소금 같은 농부가 필요합니다. 빛과 소금 같은 정직한 상인이 필요하고, 빛과 소금 같은 공무원도, 정치인도 필요하고, 빛과 소금 같은 예술가, 연애인, 노동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구석구석에 소금이 필요하고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장독이나 자루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맛을 내려면 장독이나 자루에서 퍼야하고, 음식에 뿌려져야 합니다.
소금과 빛인 우리가 교회 안에만 모여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빛이 교회만 밝히고 있으면 세상의 어둠은 누가 밝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고 빛이다”가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금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일까요?
소금은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조금 따뜻해지고, 내가 말을 하면 누군가 힘을 얻고, 내가 함께하면 일이 조금 수월해지고, 내가 있어서 누군가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소금입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막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고기와 생선을 소금에 절여 보존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썩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려면 불의와 거짓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은 발효를 시킵니다.
내가 있는 곳에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는데, 소금은 자기 모습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음식 속에 들어가 녹고 스며듭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좋은 소금은 모든 것을 소금 맛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습니다. 생선은 생선 맛이 나게 하고, 나물은 나물 맛이 나게 합니다.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로새서 4:6)
말에도 맛이 있습니다.
어떤 말은 가슴에 박힙니다. 그 말이 가시가 되어 상처를 내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은 힘이 됩니다.
“수고했어요.” “당신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괜찮아요. 다시 하면 되지요.” “당신 마음 이해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맛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한 주간 소금으로 살려고 거창한 일을 하지 마시고, 말 한마디라도 맛나게 해보십시오. 내 말을 듣고 누군가가 조금 살맛 나게 하는 것, 그것이 소금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제 빛입니다.
빛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빛은 보이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빛이 들어오면 보입니다.
그런데 빛에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추한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두울 때는 몰랐는데 빛이 비추면 먼지가 보입니다.
불의, 차별, 거짓이 그렇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누군가 빛을 비추면 그런 것들에 감추어져 있던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치기 위한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동시에, 세상의 어둠과 부끄러움을 드러내어 변화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까요?
자기가 받은 재능과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장사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로, 직장인은 자기 일터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모두 똑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제가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목회로 가져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저처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는 목사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예술가는 예술가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살아가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는가?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가?
나 때문에 누군가 살맛을 얻는가?
나 때문에 어둠 속에 가려졌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가?
그리고 감추어져 있던 불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 조금이라도 변화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이미 소금이고 빛입니다.




정체성은 나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물론,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언제나 그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목사답게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때로는 맛을 잃습니다. 때로는 빛보다 어둠에 가까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너는 이미 빛이고 소금이니 너답게 살아라.”말씀하십니다.

‘내 종교를 드러내는 것’이 빛과 소금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조금 더 자기답게 살고, 조금 더 희망을 얻고, 조금 더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증언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하신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소금과 빛입니다.”


거둠 기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말씀하신 주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 우리의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맛을 잃은 소금, 어둠과 하나 된 빛,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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