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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기념주일]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

  • 관리자
  • 2026-08-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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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12주(광복절 기념주일) 20260816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
마태복음 15:21-28

 

오늘은 성령강림 후 12번째 주일이며, 광복절 8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은 분명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지난 81년은 온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곧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전쟁을 거치며 그 경계는 철책으로 굳어졌습니다. 친일 잔재를 충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과제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광복 81년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분단이 고착되어 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경계




그런데 철조망은 땅에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세워집니다.
휴전선에는 철조망이 있지만 우리 안에도 철조망이 있습니다.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내 편과 네 편, 남성과 여성, 한국인과 이주민, 정상과 비정상,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처음에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경계가 어느 순간 상대방을 배제하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경계는 필요합니다.
경계가 있어야 ‘나’와 ‘너’를 구별하고 안전을 확보합니다. 문제는 경계가 벽이 되는 순간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경계의 밑바닥에는 상당 부분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익숙한 것은 예측할 수 있지만 낯선 것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다른 언어·문화·생각·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갖기 쉽습니다. 
 

■ 넘지 못하는 경계




어릴 적, 제가 살던 동네에 ‘개천’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장난으로 그가 걸어오는 길바닥에 선을 그어놓으면, 그는 그 선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좀처럼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철없는 꼬마들은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며 낄낄거렸습니다. 왜 그 선을 넘지 못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길바닥에 그어진 선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지울 수도 있고 한 발짝이면 넘어갈 수 있는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제로 넘기 어려운 경계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큰 경계는 그 선이 아니라,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있었겠지요. 우리는 그 사람의 두려움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경계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선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일 수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이상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또 하나의 경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 판단




‘이주민’, ‘난민’, ‘좌파’, ‘우파’, ‘동성애자’, ‘탈북민’ 같은 하나의 이름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하고, 거기에 ‘빨갱이’, ‘꼴통’, ‘맘충’ 같은 비하와 혐오의 딱지까지 붙이기 시작하면 한 인간의 복잡한 삶은 사라집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이름표만 남습니다.
특히 종교가 여기에 개입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편견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절대성이 덧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이 불편하다”라고 말하면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싫어하신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 성찰의 문이 닫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내 두려움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가치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선귤당농소>에 ‘말똥구리와 여의주’라는 글이 나옵니다.
두어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소품문’이라고 하는데 전문은 이렇습니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이덕무의 글에서는 높고 낮음이라는 인간의 기준이 무너집니다.
말똥구리는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은 말똥을 비웃지 않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삶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곧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십자가의 도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 부르며 경계 밖으로 밀어냈던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나누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경계는 언제나 그것으로 질서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힘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종교와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넘어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층 일부와 갈등하셨으며 마침내 로마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마저 하나님의 사랑을 가두지는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과 이방인뿐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사람에게까지 열려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경계를 세워 사람을 밀어내는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 막힌 담을 허무는 길입니다.
 

■ 가나인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경계 밖에 있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귀신 들려 몹시 괴로워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귀찮다는 듯 여인을 돌려보내려 했고, 예수님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모욕적인 말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다시 그 경계를 넓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이스라엘이라는 경계에서 끝나는 것이냐고 되묻는 듯한 대답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그때 그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 복음의 새로운 지평




본문 말씀은 이방 여인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알고 교제하던 사람들을 넘어서고, 예수님 자신이 알고 실천하던 계명을 넘어서고, 예수님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을 넘어서 알지 못하는 세계로 다가가셨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명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가나안 여인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이 품고 있는 더 넓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십니다.
하나님은 경계 밖에 있던 한 여인을 통해 경계 안에 있던 예수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스승이었습니다. 
 

■ 경계 밖의 스승




우리는 흔히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을 돕고, 중심에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그 생각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경계 밖으로 밀어낸 사람을 우리의 스승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했던 생각을 내려놓고 ‘혹시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이 저 사람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도 틀릴 수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으며, 하나님은 내가 그어놓은 경계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광복




그렇다면 광복 81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가 넘어야 할 경계는 무엇입니까? 
81년 전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방은 곧 분단으로 이어졌고, 휴전선에는 여전히 철조망이 서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철조망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생각이 다르면 대화하기보다 먼저 적으로 규정합니다.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주민과 낯선 사람을 밀어내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구원의 경계 밖에 세우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광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만이 광복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세워놓은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도 광복입니다.
미움으로부터 해방되고, 편견으로부터 해방되고,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고,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여 밀어내려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광복은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그어놓은 경계 밖으로 내가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 뒤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서 ‘모든 민족’으로 복음의 지평이 넓어진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안에 안전하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경계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경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




광복 81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입니다.
분단의 철조망을 넘은 평화를 꿈꾸고, 이념의 경계를 넘어 사람을 바라보고, 종교와 인종과 성별과 계층의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스승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경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경계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경계를 지키는 신앙인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우리가 그어놓은 선 너머에 하나님께서 먼저 가 계십니다.
 


■ 거둠 기도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그어놓은 수많은 선을 돌아봅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하고,
낯설다는 이유로 밀어내며,
때로는 우리의 편견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살아왔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 마음에 세워진 철책을 걷어내 주옵소서.
남과 북을 가르는 분단의 철책이 걷히게 하시고,
이념과 민족과 종교와 성별과 계층으로 나누어
서로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마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옵소서.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듯이
우리가 경계 밖에 있다고 여겼던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들을 가르치려 하기 전에 배우게 하시며,
그들을 판단하기 전에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광복 81주년을 맞아
우리의 해방이 과거의 한 사건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시며,
편견과 혐오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내 생각만 옳다는 완고함에서도 자유롭게 하옵소서.
우리의 경계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으며
경계를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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