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아홉 번째 주일(20260726)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로마서 8:26-30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강함보다 연약함을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갑자기 몸이 아플 때,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느낄 때 우리는 무력하고, 두렵고, 부끄럽고, 외롭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화가 나고, 자신을 탓하게 되고, 벙어리 냉가슴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탄식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자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자리라고 고백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신앙이 좋은 사람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도 잘 알고,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있는 사람도 연약할 때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바람과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하기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 알지 못한 채, 당장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사실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하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응답된 기도 vs 응답받지 못한 기도
신앙이 깊어지면 압니다.
응답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도보다, 응답을 받았는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한 기도가 더 많습니다. 수없이 기도했지만 병이 낫지 않은 사람도 있고,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가정도 있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도했지만 끝내 멀어진 사람도 있고, 자녀를 위해 평생 기도했지만 아무 변화도 보지 못한 부모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도는 믿음이 부족했거나 기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일까요?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정말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일까요?
오늘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닿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기도의 의미와 응답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 가장 깊은 기도 -탄식
성령께서는 우리가 탄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탄식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유창하게 기도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고 합니다. 가장 깊은 기도에는 말이 아니라 탄식이 있습니다. 너무 아프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 슬프면 기도로 문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주여!” 부른 뒤에 아무 말도 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한숨만 쉬고, 눈물만 흘리다가 기도를 마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실패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바로 그때 성령께서 대신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신다고. 로마서 8장은 탄식으로 가득한 장입니다.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인간도 탄식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령도 탄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멀리서 듣는 분이 아니라, 함께 탄식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말을 잇지 못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침묵을 기도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하여 하나님을 부를 힘조차 없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을 불러주십니다.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는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관찰하신 사건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 받는 인간과 연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역사 속에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이 몰트만 신학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을 없애 버린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통 한가운데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은 언제나 어떤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병을 낫게 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낫지 않는 병 곁에 머무르게 하시고, 길을 열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해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끝내 견딜만한 힘을 주시고,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함께 울어 줄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고통이 없어졌다는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 제목은 매우 도발적입니다.
이 제목만 보면 기도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기도를 공격하는 책이 아닙니다. 아타루는 ‘읽고 쓰는 행위를 단순한 교양이나 지식 습득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제목을 기도에 비추어 읽어보면, 현실은 외면하면서 기도만 하는 손, 고통받는 사람 곁에는 가지 않으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손,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기도하는 손, 그런 기도를 드리는 손이라면 잘라야 합니다. 기도가 해야 할 행동을 대신하는 핑계가 되고 위안이 된다면, 그 기도하는 손은 잘라야 합니다.
■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쉽게 사용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결국 일이 잘 풀릴 것이고,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선은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절에 선의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협력하여 이루는 선은 성공이나 형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좋은 일로 바꾸어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악은 악이고, 고통은 고통이며, 죽음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과 고통과 죽음조차 마지막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울 수 있는 사람으로,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루시는 선입니다.
■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자가 되는 교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비웃지 않으십니다. 더 믿으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탄식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서로의 중보자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사람 곁으로 보내십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판단은 줄어들고 연민은 깊어집니다. 기도하는 동안 그 사람의 아픔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의 가장 큰 응답은 상대방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던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관심하던 내가 관심을 갖게 되고, 멀리 있던 내가 가까이 다가가며, 말로만 위로하던 내가 실제로 짐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에게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자로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는 것입니다.
■ 맺는말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은혜입니다.
내 뜻을 관철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품으시고, 우리의 실패와 눈물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것입니다. 또 탄식할 것이고, 기도가 막히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보다 성령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고통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복음입니다.*
■ 거둠 기도
주님,우리의 연약함을 감추지 말고 성령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게 하소서.
기도할 말을 잃고 탄식할 때에도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게 하시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곁에 다가가 함께 짐을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며,
모든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연약함 속에 찾아오셔서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