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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주일] 성령 받은 사람의 일상

  • 관리자
  • 2026-05-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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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4일/ 성령 강림 주일
성령 받은 사람의 일상
갈라디아서 5:22-26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시온 성가대의 ‘불같은 성령’ 감사합니다. 성령하면 우리는 흔히 ‘불같은 성령’을 떠올립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불꽃, 방언, 놀라운 은사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그런 특별한 현상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사람을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성령을 오해합니다.
방언하면 성령 받은 사람 같고, 큰소리로 기도하면 뜨거운 신앙 같고, 무언가 평범하지 않고 비범해야 성령 충만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방언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삶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것들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방언의 은사지만, 삶에서는 아홉 가지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수는 없지만, 이 열매들은 서로 연결되어 결실을 맺게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은 사람은 나머지 열매도 맺을 가능성이 많고, 나머지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일상의 십계명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험담보다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사람은 입으로 자신의 영혼을 드러냅니다. “말은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고민하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험담 혹은 뒷담화입니다. 험담은 참 달콤합니다. 누군가를 흉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상한 동질감이 생깁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이 뒷담화의 능력이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킨 동력이라고 보기도합니다. 뒷담화를 통해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고, 누구와 한 편이 되어야할지를 결정하며 인류가 지금껏 살아왔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험담은 결국 남도 죽이고 자기 영혼도 병들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를 ‘작은 불’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숲을 태우듯 말 한마디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려고 애씁니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더 밟지 않고, 실수한 사람을 조롱하지 않고, 그 사람 없는 자리에서조차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 그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비교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비교는 영혼의 지옥입니다.
SNS가 위험한 이유는 다들 행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자랑하는 내용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SNS에 심취해 있다보면, 남의 삶은 반짝이는데 내 삶만 초라한 것 같이 보입니다. 비교는 우리를 끊임없이 목마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는 지금 여기의 삶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감사는 삶을 충만함으로 바꾸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좋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존재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오늘 숨 쉬는 것, 누군가 곁에 있는 것, 아직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영혼은 조금씩 살아납니다. 성령은 비교의 영이 아니라 감사의 영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심ㅇ르로 여러분의 삶을 충만하게 바꿔가는 복을 누리십시오.
 

3. 쉽게 분노하지 말고 오래 참으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화(anger)가 많습니다.
세상도 화가 많고, 정치도 화가 많고, 인터넷에도 화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분노가 코로나처럼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향한 미움은 정의처럼 포장되어 활보합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황폐화 시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무조건 참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미성숙함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견뎌내는 힘입니다. 분노의 결과를 미리 예견하고 분노를 놓아버리는 지혜입니다.

분노가 무서운 것은 분노하게 하는 상대방보다 분노하는 사람이 먼저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분노를 유발한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화가 날 때면,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오래 참아주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지금도 참아주셔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쉽게 화내셨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오래 참으시고, 분노가 자신을 넘어뜨리지 않는 지혜로운 삶을 사십시오.
 

4. 이기기보다 이해하려 하십시오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조금만 달라도 틀렸다고 말하고, 조금만 불편해도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을 논쟁의 승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눈물을 읽게 만드십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은 이해받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정답보다 공감을 원합니다. 누군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경험 속에서 사람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기 전에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5. 작은 약속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변화는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씨앗을 키워 결실을 맺는 것을 좋아합니다. 교회 화분 중에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시겠지만 쥐똥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으름덩굴, 마가목, 자스민레몬, 백량금 같은 나무들과 붓꽃, 들깨, 교회 근처에 퍼져있는 덩굴해란초 같은 것들은 씨앗으로 번식시킨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처음 자랄 때에는 그 변화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씨앗의 힘은 생명이 있는 한 반드시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실함’이라고 합니다. ‘믿을 신과 열매 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아도 마침내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큰 결심보다 작은 신실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작은 신실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약속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전화하겠다는 약속, 기도하겠다는 약속, 함께하겠다는 약속 같은 것 말입니다. 너무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습관적으로 쉽게하지 마십시오. 약속했다면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꼭 지키십시오. 성령의 사람은 작은 약속을 함부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거대한 일회적인 사건보다 작은 반복 속에서 증명됩니다. 작은 약속도 소중히 여기는 신실하신 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6.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늘 약한 사람 곁에 계셨습니다.
병든 사람, 세리, 죄인, 아이들, 과부들......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영혼 수준이듯, 힘없는 사람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는 그 교회의 영혼의 수준입니다. 요즘 교회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배척합니다. 배척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차별하고 무시합니다. ‘무시’가 무엇입니까? ‘없을 무, 볼시’입니다. 보이지 않으니 그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 보고 있는데도 그렇게 행동하니 힘없는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또 교회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품어야 하는데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이런저런 성경의 문자들을 제 편한 대로 엮어서 정죄합니다.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라면 약자를 배려하고 돌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큼은 실수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한남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7. 소비보다 나눔을 배우십시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가져라.” “더 누려라.” “더 소비하라.”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소비하고,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자신의 삶을 기꺼이 소비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평안함은 소비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삶의 만족을 찾고자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령은 움켜쥐게 하지 않고 흘려보내게 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보고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저렇게 서로 사랑하는가?”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교회를 구성하는 있는 신도들도 나눔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나눔이란, 꼭 물질적인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편이 되어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나눌 것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눌 것이 없어 받아야만 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8. 바쁜 중에도 멈출 줄 아십시오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쉬지 못합니다. 멈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멈추지 못하는 삶은 때로 성실함이 아니라 불안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쉬라는 말씀은  “너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십계명서 안식일에도 쉬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입니다. 쉼 없이 착취당하며 일해야만 하는 노예생활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하고, 이것을 어기면 다시 그런 지긋지긋한 노예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강력한 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잠시 멈춰 하늘을 바라볼 줄 아ㅓ는 사람입니다. 꽃 한 송이를 바라보고, 바람 소리를 듣고, 기도 속에 머무를 줄 압니다. 영혼은 쉼 속에서 숨을 쉽니다. 영혼이 숨 쉬는 삶을 사십시오.
 

9.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의 티는 보고 네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람은 남의 허물에는 민감하고 자기 어둠에는 둔감합니다. ‘동기화된 회의주의’라는 개념이 있는데 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반박할 논리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려고 하지만, 자기가 찬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성향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 안에도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쉽게 타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은 돌을 쉽게 던지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타자에 대해 판단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의 삶은 성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숙한 삶을 사는 이가 바로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10. 특별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곁에 있으면 편한 사람.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상처 입은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사람.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다투었고, 넘어졌고,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보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서로를 품는 방법 외에는 험난한 핍박의 시절을 견디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 그것도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은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비로소 성령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거둠 기도

성령의 하나님,
우리 안의 거친 말과 분노와 비교를 거두어 주시고,
사랑하고, 오래 참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배의 뜨거움이 일상의 따뜻함으로 이어지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로 기억되는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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