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네 번째 주일(2026042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창세기 6:5-8, 미가 6:6-8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무엇인가?”
더 많이 헌신하면 될까요? 더 많이 드리면 될까요?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될까요?
오늘 말씀은 그 질문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대답을 줍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심입니다.
■ 근심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6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노아가 살고 있을 때의 시대상입니다.
“사람의 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근심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후회하실 리 없다. 이 모든 것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과 폭력, 전쟁과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계획이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셨고, 심지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에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 우리의 현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8일, 이란 미나브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가 미군 토마호크 미사일의 공격을 받아, 160-180여 명의 초등학생이 숨졌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라보며 아파하신다고. 아픔을 넘어 후회하시고 근심하신다고.
이러한 정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켜보시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고통을 지켜보시며, 이 땅의 고통을 함께 겪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 모순되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또 사무엘상 15장 29절에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함이 없으시니라.”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판단을 잘못하여 뜻을 바꾸거나 실패를 수정하는 분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근심하시고 후회하시는 하나님과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은 상충되는 말씀일까요?
먼저,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 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이루어지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후회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과 언약이 흔들린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고백이고, “후회하신다”는 표현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표현은 모순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 믿음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두 번째 본문 미가서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로? 수천의 숫양으로?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으로? 내 장자를 드릴까?”(미가 6:6-7). 점점 더 과장되고 극단적인 제물의 목록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내가 무엇을 드리면 되는가?”라는 논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헌신하면, 더 많이 드리면,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이 어느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로 평가되는 자리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그 모든 질문을 단번에 뒤집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의 크기나 헌신의 양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특별한 무엇을 더 보태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일상 속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삶입니다.
지난주에 “믿음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바뀌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렸듯이, “믿음이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

그때 미가 선지자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이것뿐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정의는 단순히 공정하게 나누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 결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언제나 기울어진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의는 ‘중립’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 입고 밀려난 이들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선택입니다.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은 감정적인 동정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짓누르는 구조와 마주하는 용기이며, 때로는 내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이익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정의는 순간적인 분노로 끝나지 않고, 오래 견디는 사랑과 함께 갑니다. 성경에서 정의와 인자가 함께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의는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한 칼이 아니라,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손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 난 세상을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결국 정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태도입니다. 약한 이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는 것, 불편한 진실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곁에 조용히 서서 함께 아파하는 것.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고, 하나님의 마음이 흐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자

미가서에서 말하는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가 아니라, 관계를 끝까지 붙드는 사랑,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식어도, 상황이 불리해져도, 상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쉽게 끊어버리지 않는 사랑, 바로 그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향해 헤세드를 베푸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도, 언약을 깨뜨려도, 하나님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점에서 인자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관계를 정리하고, 손해가 되면 돌아서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헤세드는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머무는 사랑, 한 번 더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계를 무조건 유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관계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계산과 조건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려는 마음으로 관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미가가 “인자를 사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윤리적 요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방식을 닮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흔들릴 때에도, 관계가 어려워질 때에도, 여전히 사랑을 선택하는 것—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자의 삶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아는 영적 분별입니다.
미가서 6장 8절에서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할 때, 여기서 ‘겸손히’는 히브리어로 ‘차나(צָנַע)’인데, 이는 조용히, 절제하며, 자기 한계를 아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겸손은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고, 옳고 그름을 단정하며, 때로는 타인의 삶까지 결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앞서가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묻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시선을 배우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은 근심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가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지를. 정의를 행할 때, 인자를 사랑할 때,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는 삶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신앙은 말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겸손을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이 모여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거둠 기도
사랑의 하나님,
세상의 악함을 보시며 근심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