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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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후 세번째 주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 관리자
  • 2026-04-1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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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세 번째 주일/ 4.19 혁명 기념주일(20260419)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요한복음 4:1-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보고 살아갑니다. 
눈을 뜨면 세상이 들어오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다 보고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다 보고 있는 것일까요?

 

■ 눈 깜짝할 사이


평균적으로 사람은 분당 15~20번 정도 눈을 깜빡인다고 합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0.3초, 그러니까 깨어있는 동안에도 1/10 정도 되는 시간은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깨어있는 동안 끊기지 않고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합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바라보는 행위에 대해 조금은 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본다는 것’은 중립적일까요?
어느 봄날 식물학자와 시인이 함께 풀밭을 거닙니다. 과학자와 시인은 같은 풀밭을 걷지만, 서로 다른 풀밭의 풍경을 보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다는 행위는 중립적일 수 없고, 자기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오늘 날 과학기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에는 ‘관찰자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중 슬릿’ 이라는 실험을 통해서 아주 작은 입자가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흩어진 파동처럼 존재하다가, 바라보는 순간부터 하나의 점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즉, 보는 행위가 보이는 대상을 바꾼다는 이야깁니다. 작은 입자는 관찰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 바라본다는 것


이 이야기는 과학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한 예를 들어 카메라가 자기를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행동이 변합니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해도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있는 생각으로 판단해서 자기의 생각의 안경너머로 봅니다.

누군가를 향해 “저 사람은 문제”라고 바라보면 그 사람은 점점 더 문제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저 사람은 가능성이 있어”라고 바라보면 그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역사에 대한 평가


이제 시선을 조금 더 넓혀 보겠습니다.
4월은 우리에게 역사를 다시 묻는 시간입니다. 먼저 4·19 혁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름 속에는 정의와 용기와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항쟁’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반란’이라 부릅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이름은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지면 기억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역사의 진실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단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옳다, 그르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이념이라는 안경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중립적일 수 없고, 자기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진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보시는 것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사무엘상 16장 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시선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겉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이해하려 하십니다. 사람은 나누지만, 하나님은 품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시선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시선은 늘 한 방향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은 억눌린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를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노예로 신음하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억압받는 백성의 눈물을 대신하여 분노하셨으며, 예수님은 병든 자와 죄인과 버림받은 자들의 곁에 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애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또한 여러분의 중심을 향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서로를 판단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되길 바라신다는 것을. 


■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 하나님의 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십니다. 사람들이라면 피했을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로 가시고,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가장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사람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얼굴도 마주하지 않던 사이였습니다. 게다가 여자였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남자가 낯선 여자와 말을 섞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공동체 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이름을 붙였고, 이미 판단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사람들의 평가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 여인을 “목마른 존재”로 보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이 말은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경계, 남자와 여자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그 모든 선을 넘어서는 말이었습니다.
 

■ 이 시대의 우물가 여인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먼저 이름을 붙입니다.
성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낯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보지 않으시고 하나의 존재, 온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정체성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목마름으로 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우물가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 낯선 땅에서 이름 없이 일하는 사람들, 사회의 기준에서 밀려나 늘 주변에 머물러야 했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쉽게 규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겠다.”

■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다고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두려워하고, 그래서 밀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경계를 넘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판단하기 전에 사랑하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눈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보는 눈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 역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타자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대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역사를, 사람을 보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판단하는 눈이 아니라 이해하는 눈을,
정죄하는 눈이 아니라 품는 눈을,
닫는 눈이 아니라 살려내는 눈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 거둠 기도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을 허락하소서.
세상을 바르게 보고,
역사를 아프게 기억하며,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이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눈이 아니라,
다시 살려내는 눈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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