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두번 주일(20260412)
의심을 통과한 믿음
요한복음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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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믿음이 참 단순했습니다.
그냥 믿었습니다.
묻지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신학을 배우면서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하나둘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들은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고 제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믿음이 깊어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흔들림의 시간을 다 견디지 못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함께 신학교에 들어왔던 동기들 가운데 목회의 길을 계속 걷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이들 가운데서도 또 나뉩니다.
의심을 멈추고 확신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그리고 의심을 통과하며 믿음을 다시 붙잡은 사람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지금도 질문이 많고, 지금도 흔들립니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의심이 믿음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더 깊은 자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입니다.
“ὁ κύριός μου καὶ ὁ θεός μου”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 짧은 고백은 요한복음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오랜 기다림과 흔들림, 그리고 끝내 지워지지 않았던 의심을 품고 있던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고백한 신앙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의심의 골짜기를 건너온 사람의 입에서, 비로소 신앙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의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그는 공동체의 환호 바깥에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그는 믿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믿지 않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그의 말 속에는 완강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으려는 한 영혼의 진지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믿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하면 그 말이 진리인 줄 알고,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 길이 옳은 길인 줄 착각합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생각을 멈추고, 질문을 접어버립니다.
그러나 질문을 잃어버린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도 질문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늘 우리의 언어를 벗어나 계시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을 향해 더듬어 가고, 그분을 향해 질문하며, 그분 앞에서 흔들릴 뿐입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 신앙입니다.
도덕경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붙인 이름과 개념 속에 하나님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붙잡을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압니다. 확실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알 수 없음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을.
■ 의심을 통과한 신앙
여드레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도마를 부르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 보아라.”
이 장면은 믿음에 대한 가장 깊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확신하는 사람에게만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의심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도 친히 다가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의심을 꾸짖지 않으시고, 의심의 자리까지 걸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도마가 상처를 만지는 그림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마 카라비조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그림일 겁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엽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깊이 넣어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도마가 만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은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도마를 그렇게 그렸습니다. 왜냐하면, 늘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을 알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믿음은 확인의 결과가 아니라, 만남의 사건이라고.
도마는 손으로 만지기 전에, 이미 존재로 만져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만지지 않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은 지식의 결과가 아닙니다. 논증의 결론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의심을 통과한 사람만이 도달하는 자리, 자기 존재가 흔들린 끝에 비로소 붙잡히는 진실입니다.
■ 믿음은 질문을 살아내는 일
의심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반듯해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내리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의심을 통과한 신앙은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한 번 흔들려 본 사람만이 무너지지 않는 자리를 압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들까지도 사랑하라.
그 질문들을 닫힌 방처럼,
다른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라.
지금은 답을 구하려 하지 말라.
그대는 아직 그것을 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 그 질문들을 살아라.
그러면 어느 날,
그대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답 속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믿음은 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심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심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이 깊어지는 길입니다. 다만, 그 의심 속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의심을 안고 주님을 붙잡고, 주님 앞에 서십시오. 그때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 거둠 기도
주님,
확신만을 구하며 살았던 우리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의심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그 질문과 흔들림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보지 못해도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의심을 통과한 믿음으로 오늘도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