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 4·3항쟁추모주일 (2026.4.5)
선지자 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2:38-39, 요나 1:17

사람들은 저마다 표적을 구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거나, 확실하게 느껴지는 어떤 증거가 있으면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그들은 다시 묻습니다.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왜 하필 요나일까요?
우리는 요나의 표적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사흘과 연결하여 부활의 표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피해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는 사람, 그가 요나입니다.
그런데 왜 도망갑니까?
니느웨에 경고를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원수 같은 그들이 용서받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단순히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자기 생각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요나는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추적하듯 따라가시며 조용히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도망칠 때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심지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사람에게까지도 부활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 죄를 자각하는 사람

풍랑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칩니다.
그런데 요나는 배 밑바닥에서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참 묘합니다.
세상은 무너지고 있는데 신앙은 잠들어 있는 상태, 풍랑과는 상관없는 듯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상태, 이것이 요나의 모습이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풍랑이 없었다면 요나는 그대로 다시스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은 요나를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흔드심이었습니다. 요나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 풍랑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풍랑이 와도, 제비를 뽑아도, 짐을 버려도, 끝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여기서 갈립니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사람에게 부활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요나의 던져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고하는 하나의 몸짓과도 같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생명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의 공간입니다.
빛도 없고, 방향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요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절규 속에서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고백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부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은 죽음과 같은 자리,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시 부르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건, 그것이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너무 멀리 두고 생각합니다.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 언젠가 경험하게 될 사건, 그러나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몰트만의 말처럼 “죽음은 단수이지만 부활은 복수”입니다.
죽음은 한 번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 순간들이 모두 부활입니다.
부활은 반복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 이야기도 알고, 부활 신앙도 알지만, 삶은 그대로인 채 생각만 바뀌는 신앙, 예수님이 꾸짖으셨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깨닫지 못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이 삶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니느웨를 향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느냐?
너는 깨어 있느냐, 아니면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있느냐?
너는 죽음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빈 무덤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때 사람이 살아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주 4·3을 기억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반복된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묻습니다.
생명은 어디에서 다시 시작되는가?
증오와 침묵이 아니라, 기억과 회개와 돌이킴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 자리에서 부활은 다시 일어납니다.
이 부활주일에 요나의 표적을 따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둠 기도
생명의 하나님,
죽음의 자리에서도 다시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요나처럼 주님의 뜻을 피해 도망가고,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있던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서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 기억하는 제주 4·3의 아픔 위에도 주님의 자비와 위로를 더하여 주시고,
죽음의 역사를 넘어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