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3주(20260308)
내가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
출애굽기 17:1–7
얼마 전 영화 김형협 감독의 ‘신의 악단’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배우 정진운이 부르는 ‘광야’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나면 처형될 악단을 빼돌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그 노래는 광야를 저주하는 노래가 아니었고, 광야를 미화하는 노래도 아니었습니다. 광야 한가운데서, 아직 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부르는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대부분의 순례자는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먼 길을 떠났을 때, 홀로 있을 때, 광야와 같은 시간을 보낼 때 노래를 부릅니다. 저는 ‘감사해’라는 노래를 자주 부릅니다. ‘감사해, 시험이 닥쳐 올 때에 주께서 인도하시니 두려움 없네...’ 찬양을 부르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를 받습니다.
왜일까요?
광야는 하나님이 떠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더 깊이 숨어 계신 자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반복되는 광야

오늘 본문 출애굽기 17장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유월절을 지나왔습니다. 홍해를 건넜고, 마라의 쓴 물도 경험했습니다.
엘림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물이 없습니다.
광야는 이렇게 반복됩니다.
이렇듯 은혜를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목마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거듭남을 경험했다고 해서, 성령임재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한 문제를 넘기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한 고비를 지나면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립니다.
목마름이 깊어지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 질문이 올라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
그래서 그곳 이름이 붙습니다.
맛사 — 시험과 다툼.
므리바 —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는 질문.
저는 오늘 므리바라는 이름에 더 마음이 갑니다.
광야의 본질은 다툼이라기보다는 이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광야가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신 분들에게 광야가 있습니다. 치료가 길어지고 회복이 더딜 때 그곳이 광야입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분들에게 광야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곳이 광야입니다. 가정의 문제로 마음이 타들어가는 분들, 외로움 속에 있는 분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 광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저 마다의 광야에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중에 계십니까?”
“우리 중에 계신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
이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리임에도 하나님은 “내가 거기 서리라”고 하십니다. 백성이 다투고 시험하는 자리임에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고 거기에 서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우리 중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때 하나님은 “내가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자 물이 터져 나옵니다.
돌에서 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개입하십니다.
어쩌면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완전히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체계가 아니라 설명 너머의 신비를 신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비가 현실도피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는 성경의 믿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칩니다. 그러자 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상식이나 과학을 벗어나는 신비요 기적입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모두 상식이나 과학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광야와 같은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지난주 우리는 시편 121편을 묵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신다.”
히브리어로 샤마르שָׁמַר입니다. 가까이에서 살피며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멀리서 관망하는 보호가 아니라, 곁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지킴입니다.
잊지 말아야할 몇몇 히브리어 단어들이 있습니다.
임마누엘עִמָּנוּאֵל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광야를 걷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인사처럼 건네는 말, 샬롬שָׁלוֹם —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완성되는 온전함입니다.
므리바מְרִיבָה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예, 계십니다.”
오아시스 엘림에서도, 쓴물이 나오던 마라에서도, 르비딤에서도, 므리바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이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어 계신 시간입니다.
여러분, 사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질문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목회자로 서 있지만 저 역시 이 질문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애써 전한 말씀이 열매 맺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더니 비난과 손가락질이 돌아오기도 했고, 말씀 따라 살고자 했을 때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 역시도 묻습니다.
“주님,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질문을 던지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미 서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광야가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광야에서도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제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삶이 광야라면, 혹시 목이 타들어가는 시간이라면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내가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샤마르 — 가까이에서 지켜보시며,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하시며, 샬롬 — 결국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광야를 걸으며, 목이 말라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내가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 중에 서 계실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중에도 절망하지 마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 거둠 기도
임마누엘 하나님,
주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허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