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일(사순절 두 번째 주일/ 107주년 3.1절 기념주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창세기 12:1-4
[롬 4:1-5, 13-17, 요한복음 3:1-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21편은 많은 이들이 위로의 시편으로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 구절은 종종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힘을 얻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작은 그렇게 낭만적인 장면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평온한 마음으로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앞에 서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이 질문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불안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 시편 121편에서 ‘산(山)’의 의미
시편 121편에서 ‘산’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온성이 있는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 신앙의 중심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정웅 선생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으로서의 ‘청산’, 곧 유교적·문화적 상상 속의 안전한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산이 시온산이든, 청산이든, 혹은 그저 우리가 마주한 어떤 산이든, 산은 순례자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산에는 여전히 위험이 존재합니다. 길은 험하고, 시야는 가려지며, 예상하지 못한 위협이 도사립니다. 심지어 시온산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거룩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처럼 우리를 지키고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산에서 답을 찾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그리고 곧바로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고백은 산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산을 절대화하지 않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 우리가 만든 산(山)
우리는 살면서 여러 산을 만들어 왔습니다.
경험이라는 산, 책임감이라는 산, 성취라는 산, 관계라는 산, 심지어는 신앙의 열심이라는 산까지 쌓아 올리며,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어 왔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 몸과 마음이 버거울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산들을 바라보며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만큼 했으니 버틸 수 있겠지” 하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그 산들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시온산이든, 우리가 꿈꾸는 청산이든, 어떤 산도 하나님처럼 우리를 지키고 보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산을 향해 눈을 들었지만, 산에서 답을 찾지 않고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그리고 곧바로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샤마르
시편에서는 “지키신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샤마르’는 단순히 멀리서 지켜본다는 뜻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살피고 보호한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무심히 관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형편을 눈여겨보시며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을 만나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보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위험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도 우리가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은 고난을 제거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도록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고난을 피해서 성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견딘 후에 성장합니다. 책임을 감당한 뒤에 사람이 달라지고, 상실을 지나온 뒤에 시선이 깊어지고, 무너질 뻔한 시간을 통과한 뒤에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몸의 고백이 됩니다.
라캉의 말로 하자면, 고난은 우리를 쥬이상스의 경계까지 데려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됩니다.
■ 산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산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산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산이 사라진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의 위협이 없어졌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산이 여전히 앞에 있고,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산을 바라보고 걸어가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산을 보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산에서 답을 찾지 말라고 말합니다.
산은 여전히 위협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산을 바라보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 사순절과 3.1운동 107주년을 맞이하며
이번 주는 사순절 2주이자 3·1절 107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3·1운동의 그날은 산이 사라진 날이 아니라, 가장 높은 산 앞에 선 날이었습니다. 제국의 폭력과 실패의 가능성, 감옥과 죽음의 위협이라는 산이 분명히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그 산을 보지 못해서 나선 것이 아니라 그 산을 보면서도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산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산보다 크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라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산에서 답을 찾지 않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시선을 돌렸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지켜주심’은 고난을 면제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눈을 떼지 않으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순절의 길과 3·1의 길은 이렇게 닮아 있습니다.
산은 여전히 앞에 있고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보호하신다는 신뢰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 아브라함의 떠남 – 산을 등지고 걷는 믿음
오늘 병행 본문으로 주어진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이 ‘떠남’은 용감한 결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가족은 익숙함이었고, 안전이었고,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산을 붙들고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산을 등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길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앞날이 분명해서 떠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불안했고, 두려웠고, 보장된 미래 없이 걸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 길을 지켜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떠남은 산이 사라진 길이 아니라, 산을 지나야 하는 길이었고,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라는 질문을 몸으로 살아낸 길이었습니다.
시편 121편의 순례자와 아브라함은 모두 산 앞에서 불안을 느꼈지만, 산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를 늘 지켜주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 거둠 기도

주님,
우리는 자주 우리가 쌓아 올린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를 실족하게 하지 않으시고,
그늘이 되어 주시며, 지금도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