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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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1주] 주님이 인도하는 길

  • 관리자
  • 2026-02-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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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째 주일, 주일낮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어릴 적, 국민학교에서 반공 글쓰기 대회, 반공 그림 그리기 대회라는 걸 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글쓰기 대회나 그림 그리기 대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반공 그림 그리기 대회의 입상작들을 보면, 지금은 참 재미있는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모습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사람의 모습이나 얼굴은 돼지의 모양새를 하고 있거나 분명 모습은 늑대의 모습인데, 탱크를 운전하고 군대를 이끄는 그림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에선 돼지와 늑대가 북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줄 아는 어린이가 많았습니다. 그 이후로 민주화가 이뤄지고 엄혹했던 냉전의 분위기가 따뜻해지면서 그곳도 나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당시 우리나라에선 화를 넘어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해 적을 악마로 만들었습니다. 적을 악마화하는 건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택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인류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악을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의 오감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없었던 괴이한 현상이라든가 강력하고 무서운 어떤 존재를 상상으로 구현해 악을 그렸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괴물과 무서운 존재들은 악마의 이름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리워야단, 리바이어던이 그런 괴물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악을 강력한 존재로 만든 것은 아마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약한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음을 항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강력한 존재 앞에 무력한 인간, 협박이나 회유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 만약 악이 나약한 존재였다면, 이런 상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악의 모습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건국 이야기가 신 혹은 그의 아들에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인간 중에서 뛰어난 영웅으로 작아졌다가 종국에는 누구나 왕이 되는 이야기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선 같은 경우는 나라를 세운 왕이 자기 핏줄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조상의 업적을 부풀려 권위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악마는 일반적인 모습과 좀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서일과 중 구약 성경의 말씀은 창세기 2장의 마지막과 3장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뱀은 강력한 존재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뱀의 독은 강력하지만, 이야기에서 뱀은 강력한 포스를 내뿜지 않습니다. 조용히 옆에 있는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조곤조곤하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어?’ 일부러 반대로 질문해 관심을 끌려는 시도였고, 이미 아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며 다음 질문을 위한 빌드업이었습니다. 여자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겠죠. ‘아니, 그게 아니고.’ 여자는 뱀에게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한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약속을 어기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처벌이 있음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자에게 억지로 그 열매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너무 무서워 도저히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여자의 호기심을 부추겼습니다. 그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으며,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자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열매도 그대로였고, 뱀도 그대로였지만 여자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여자의 눈에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게되었습니다. 이전에 없던 호기심과 욕망이 강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여자의 호기심과 욕망이 열매를 먹게 했고, 그 옆에 있던 남자도 먹게 되니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몸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 열매의 이름이 선악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떤 열매를 먹어야 선과 악을 알 수 있냐라거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실제로 있냐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냐 하지 못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여자와 남자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게 하셨지만, 단 하나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어기자, 이들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 게 아니라 약속을 어기는 악한 행동을 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그들을 휩쌌고 몸을 가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악은 거대하고 무서운 존재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인간을 유혹하고,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항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남자는 이후 죄를 인류에게 전하는 존재가 됐고, 그 벌로 죽음을 있게 만든 원흉이 된 것입니다.

 

성서일과의 서신서 말씀인 로마서 512~19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최초로 죄를 지은 남자인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 죄가 어떻게 퍼졌고, 죄의 처벌인 죽음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사실 모세 이전까지는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 이후에 기독교를 전하며 증명해야 했던 학자들은 아담의 죄와 그 처벌인 죽음이 어떻게 대물려 왔는지 설명해야 했습니다. 당시 학자들은 죄를 마치 전염병이나 악마의 권능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그 벌인 죽음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죄와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낸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전달된 은혜로 말미암아 무죄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인류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면, 그리스도 예수 한 사람으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은혜와 선물을 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율법으로 억눌리고 죄인으로 낙인찍혀 괴로워하던 유대 백성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삶이 바뀌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존재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정황적 판단을 절대적인 신학의 명제로 만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뱀과 같은 존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나아가 삶이 바뀌어야 함을 기억해 주십시오.

 

성서일과의 복음서 말씀인 마태복음 41~11절 말씀은 그런 모습을 잘 알려줍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 악마에게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그 내용입니다. 예수가 밤낮으로 40일간 금식했고, 그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악마는 그에게 세 번의 시험을 했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시험을 뿌리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인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는 역시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시험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인상 깊게 여기는 이유는 말씀 때문이라기보다 어린이 성경이라는 책에서 본 두 장의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면, 배경인 광야를 그리고 주인공인 예수를 그린 다음, 무시무시하고 막강해 보이는 악마를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여러분이 화면에서 보시는 대로 마치 예수의 내면을 그린 것처럼 그렸습니다. 악마라는 타자화된 대상이 아니라 인간 예수 안에 숨겨진 모습인 것처럼 느낄 수 있게 그렸습니다. 전 그때까지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터라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거대하면서 무섭거나 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또 나를 위로하듯 다가와 내 욕망을 부추기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악이라는 존재가 내 안에 존재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그러고 보면 예수가 이런 수행의 과정을 광야에서 겪었기에 유대로 돌아와서도 그 어떤 존재가 유혹하거나 강하게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관통하는 소재는 죄와 악입니다. 뱀의 유혹으로 시작된 남자와 여자의 죄는 온 인류에게 죽음을 선물했고, 그리스도 예수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악으로 불릴만한,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고,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그 이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삶이 새롭게 되는 변화를 겪었고, 그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문화 한 편에서는 악을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그릴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비합리적이고 모순되는,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니까요.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존재로서의 악은 인간을 교훈적 의미로 변화시키기는커녕 악을 타자화된 존재로 인식해 나와 상관없다는 인식을 줍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 창세기의 뱀이나 마태복음 속 예수를 유혹했던 그 내면의 모습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강력한 악의 현신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누가 봐도 나쁘거나 강한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왔던 악마의 모습처럼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우리가 지닌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기심과 욕망, 열등감이나 피해의식, 우월감이나 과시 욕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잘못된 길로 안내합니다. 아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때, ‘한 번은 괜찮겠지.’하는 마음을 부추깁니다. 사람의 삶은 수만 번의 선택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나무의 나이테와 같습니다. 어떤 한 선택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아까 시작할 때, 어린이부 친구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선택하면서 늘 고민하고 의문을 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선택이 우리의 삶을 만듭니다. 한두 번의 선택만으로 악한 길에 빠지지 않습니다. 한두 번으로 시작된 선택이 계속 삶을 이루게 되면, 그 이후로는 고민하지 않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고 멸시합니다.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성서일과 시편 32편의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 얻게 되는 복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면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내 피난처가 되시고 무엇보다 나를 눈여겨보며 내 길을 인도하며 조언을 해주는 분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그래서 악한 이들에게는 고통뿐이나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가는 사람에겐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니 즐겁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한두 번 놓쳤다고 후회해선 안 됩니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혹과 욕망의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한두 번 선택을 잘못하게 되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와 멀어지면서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여전히 예수 주변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주여, 주여외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재갈과 굴레를 씌워야만 잡아 둘 수 있는 분별 없는 노새나 말처럼 되지 말아라.’ 여러분이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귀를 열어 듣고, 눈을 열어 볼 수 있다면 기뻐하고 환호하는 복을 얻는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한 주를 살아갈 때, 주님이 인도하는, 복으로 가는 길을 걸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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