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여섯째 주일낮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추억하는 설 명절의 모습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 음식을 만들고, 그간 나누지 못했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헤어질 때도 못내 아쉬워하고, 집에 가서 먹으라며 한 보따리 싸가는 명절 음식이야말로 당시의 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 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전날, 같이 만들던 명절 음식은 각자 조금씩만 만들거나 사고, 서로의 중요한 안부를 묻는 대신 가벼운 인사로 대체합니다. 명절 당일에 만나 각자 만든 음식을 나누고 헤어집니다. 예전에 비하면 간소하고, 교류도 적어 정이라곤 느낄 새 없이 후다닥 지나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납니다. 왜 이렇게 변한 걸까요? 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 모르던 것을 나이가 들고 보니 보이고,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름답게 말씀드려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 가족이 함께 있었지만 명절 음식을 만들었던 건 주로 엄마나 할머니였고, 아빠와 할아버지, 삼촌은 편하게 티브이를 보거나 한창 만들고 있는 명절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드셨습니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주변에 있던 형제자매의 자녀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공부는 잘하냐, 시험은 잘 봤냐, 결혼은 언제 하냐 등등.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엔 본인의 과거나 자기 자녀의 안부를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해 다른 형제와 비교할 때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추억 속에 이런 현실이 숨어 있어서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명절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여기서 명절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함께 명절 음식을 만들며, 애정이 듬뿍 담긴 안부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모였고, 음식을 준비해야 하니 엄마나 며느리에게 시켰고, 친척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핑계 삼아 무례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명절의 목적을 무색하게 했고,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를 보듬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쪼록 여러분이 맞이할 명절엔 목적을 비롯하여 따뜻함과 아름다움이 넘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2~18절의 말씀을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야훼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이스라엘을 부탁하고 야훼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엿새를 기다린 후에 이레째 하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사십 일간 산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이 계시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나라의 면모를 갖춰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은 히브리라는 사회 계층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히브리는 하나의 민족이 아닌 사회의 피지배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 신음하던 히브리의 소리를 야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모세를 시켜 그들을 구원해 낸 것입니다. 그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할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야훼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자기를 영웅화하지 않고, 업적의 공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자칫 히브리들의 관심이 모세로 쏠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대리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양 으스대지 않았고, 히브리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탈출했던 이집트 제국의 모습을 따라 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그들처럼 누군가를 지배하고 군림하지 말라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들은 ‘야훼 하나님이 다스린다’라는 고백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주변 나라들이 왕을 세워 나라의 기틀을 강력하게 만들 때도 이들은 왕이 아닌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부족 연맹 형식으로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레위기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라고 발전되었고 이것이 주변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었던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21절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의 권위가 그리스도 예수를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며, 그의 말과 행동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예수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거나 내 말에 권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은 수년간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곁에서 함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이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과 말씀을 따라 살고자 결단한 이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베드로후서 1장의 시대적 배경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을 예상했습니다. 스승 예수도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했던 것처럼, 예수를 잘 몰랐다가 그가 부활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 베드로였기에 그 역시 죽음을 예상하고 공동체에 자기의 경험과 그에 기인한 신앙과 예언을 전수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공동체는 영지주의와 회의론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영적 존재일 뿐, 육체를 지니지 않았다는 둥,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니, 육체로는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로 공동체를 현혹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과 운동을 왜곡하는 짓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는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고발당할 경우, 예수를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했던 로마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이렇게 흔들리는 공동체에 베드로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권면을 준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지금은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있지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등불 삼아 견뎌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예언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힘을 얻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환경을 버텨내길 바랐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9절은 베드로후서 1장과 연결되는, 베드로가 경험했던 변화산 사건을 증언합니다. 예수와 제자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은 높은 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얼굴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 황홀한 경험을 한 나머지, 현실을 외면하고 그곳에서 머무르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고, 제자들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무서움에 떨자, 예수는 그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보였다고 여기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 멸망하고,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로 하나님의 존재조차 잊어갈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다고 여겼습니다. 예수와 산에 올랐던 제자들은 강대국 로마에 빌붙어 권력을 탐했던 사두개인, 율법에 얽매여 백성들을 악으로 몰았던 바리새인이 아닌 유대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예수께 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모습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자기가 메시아로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산에서 내려온 이후,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몰아쳐 갔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는 정해진 것 없고 변화가 극심하며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이야기하는 듯 보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히브리의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서가는 과정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났고, 마태복음에서는 나라를 잃고 수년간 강대국의 지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황 속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공동체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영지주의와 로마의 압제에서 버틸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서일과의 말씀을 해석하며 말씀의 배경들이 정해진 것 없고, 변화가 극심하며 위태로우며 혼란스러웠을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은 어떤가요? 어쩌면 방금 드린 말씀이 가장 적확하게 표현된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 문명이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농사 중심의 시대가 불과 50년 전이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우리는 엄청난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는 마을 공동체에서 나라,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집 전화는 삐삐, 시티폰, 휴대폰을 거쳐 스마트폰으로 진화했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급격한 변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지능을 대신하고자 만든 AI가 기업의 신입사원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엔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해 일정 기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후 기업은 경력사원이 된 신입사원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AI가 신입사원의 일을 대신하기에, 기업이 굳이 신입사원을 뽑을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로 바뀌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상황은 상당한 위기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그 위기는 잘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제지표가 오르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위기는 보이지 않게 퍼져갑니다.
송길영 작가는 2023년부터 매해 ‘시대예보’라는 시리즈로 책을 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키워드나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빈도를 연구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과 미래를 예측했습니다. 작년에 나온 ‘경량 문명’이라는 책은 기존에 다양한 경험과 오랜 지식의 축적으로 살아왔던 기성세대가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기대는 모습과 새로운 문명을 잘 받아들이지만,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는 청년세대의 모습, 모두에 우려를 표합니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역시 빠른 속도로 퍼지는 AI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할 것 없이 큰 위험에 처할 거라고 강조합니다. 학생들이 AI에 의존한 나머지 사고하지 않고, 기성세대가 만든 교육이 학생의 등급을 매기는 수단으로 전락해 간다면 장래는 더 어두워질 거라고 진단합니다. 곧 닥칠 미래가 아닌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시험을 보는데, AI를 이용하다 걸린 일이 벌어지고, 관리자로 일하던 기성세대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회피하며 심지어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히브리들을 이스라엘로 이끈 모세. 강대국 로마의 지배 속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인 그리스도 예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왜곡하고 로마가 극심하게 탄압하는 와중에 공동체를 권면했던 사도 베드로를 관통하는 것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차분히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서일과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그 뜻이 이뤄지길 원했으며, 삶으로 그 뜻을 살고자 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무섭게 다가온 AI가 만들 세상이 뚜렷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두려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며 그의 음성에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의 공동체가 주변과 구별된 이유, 사도 베드로가 죽음을 앞두고 공동체를 위해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음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오는 수요일부터 예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올해 사순절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집중하고, 나를 되돌아보며, 주위를 살피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예언하고 계신지, 기도를 통해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주위를 살피며 내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고 계신지 찾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고난은 십자가로 인한 육체의 고통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열심히 따르던 지도자가 불의하게 죽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을 때까지 그가 가르치고 벌였던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조차 그가 설파한 하나님 나라를 제2의 다윗 왕국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고난을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상처와 사회적 소외로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의 죽음과 부활이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레위기의 고백은 히브리 공동체로부터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그 뜻을 펼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 동안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삶의 예배를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같이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