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4주(20251221)
여기에 계시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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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10-1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넷째주일에 밝힌 네 번째 초의 상징은 평화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평화이신 샬롬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서, 성탄을 앞두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대림절은 흔히 ‘기다림의 절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림절은 기다림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사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환한 장식보다, 밝은 노래보다, 오히려 광야와 침묵에 더 가까운 절기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확실한 답을 원합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도, 정치도, 관계도, 미래도 흔들립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말합니다.
“확실한 신앙을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과잉 믿음, 과잉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한 번도 두려움이 사라진 삶, 두려움이 없는 삶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서는 정직하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씀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땅 끝에서』라는 산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멀리 있다. 끝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의 순간이 와야,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는지를 새삼스럽게 발견합니다.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자신을 만나는 곳이고, 자신을 만난 곳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므로 세상의 끝은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소설가의 문장놀이가 아닙니다.
희망의 신학자 불트만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의 순간은 곧 부활의 순간이다.”라고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비슷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야 하고, 자기 확신이 무너져야 하고, 자기가 그동안 만들어 온 신앙조차도 해체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중간에서 멈춥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반복해서 세상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과 예수, 제자들과 사도 모두 세상 끝까지 간 이들이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읽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도망자였습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 익숙한 집을 떠나 광야로 나섰습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영웅처럼 출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두려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 끝으로 가셨습니다.
세상으로 나간 그 첫날 밤,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곳은 집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고, 안전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은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개역성경의 해석으로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야곱이 알지 못했을 뿐, 하나님은 이미 루스에 계셨습니다.
그곳은 곧 하늘의 문이었고,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에 루스가 벧엘이 되었습니다.
루스는 ‘아몬드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루스는 종교적 의미가 없는 일상의 공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바뀐 것이 아니라, 의미가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산울림 김창환의 ‘너의 의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너가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니까, 너의 작은 말 한 마디, 작은 미소도 커다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루스에 계시는 하나님, 그분을 만나시어 여러분의 루스를 벧엘로 만들어 가는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임마누엘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다”라는 약속도 아닙니다. 임마누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자리에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욥이 그랬습니다.
그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동행을 은폐하셨을 뿐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사실주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말합니다.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삶의 전부를 이해하거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지 못한 시간이라도 우리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동행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셨고, 우리의 신앙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두려움은 있습니다.
눈물도 있고, 불안도 있고, 의심도 있고 실패도 있고, 넘어짐도 있고, 심지어는 유혹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러한 것들이 삶의 주인이 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 끝까지 가야 하는 그 길은 고독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요,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실패나 유혹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절 넷째 주일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도 여전합니다. 삶의 질문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가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광야를 지나셨고, 우리보다 먼저 침묵을 견디셨고, 우리보다 먼저 인간의 불안을 몸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대림절은 빛이 갑자기 밝아지는 절기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이미 와 있음을 알아차리는 절기입니다.
내일(22일)은 어둠이 가장 깊은 동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동지가 지나고 나면, 어둠의 시간은 짧아지고, 빛의 시간이 점점 길어질 것을.
오늘 우리는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기에 기뻐할 수 있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믿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계시거늘’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문 앞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야곱처럼,
바로 여러분의 일상이 펼쳐지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임을 깨달아 힘찬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혼자라고 느꼈던 자리에도 주님께서 이미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도 그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