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교회 2025년 11월 23일 설교문 / 지강유철 작가
눈물의 사람 요셉 (제목을 누르시면 음성설교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15-21
요셉 이야기의 특징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아니 구약 성서 전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요셉 평생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110살에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철저하게 요셉에게 숨어 계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12번, 야곱에게 9번, 이삭에게 세 번이나 꿈으로, 환상으로, 음성으로 이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랬던 하나님이 어찌된 일인지 요셉에게는 평생 그 어떤 말씀도, 환상도, 꿈도, 음성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가 구약의 그 어떤 인물 이야기와도 다른 첫 번째 내용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두 번째 특징은 신앙적 표현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을 아무리 살펴도 요셉이 기도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요셉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이 평생 서너 차례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할 때, 바로 왕과 술과 빵 맡은 관원장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형들 앞에서 자기가 요셉이라고 밝힐 때, 죽기 직전 유언을 남길 때만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 이것 말고 저는 요셉이 종교적 표현을 한 것을 창세기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요셉 이야기를 세속화된 스토리라고 부릅니다. 물론 나쁜 의미에서 세속적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2. 진정한 거룩
요셉의 이야기에는 왜 기도, 찬양, 예배를 강조하는 내용이 없을까요. 요셉이 무신론자처럼 기도도 안 하고 찬송도 안 부르고, 예배도 안 드리는 나이롱 신자였기에 그렇게 썼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 이야기에서 찬송, 기도, 예배가 빠져 있는 걸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집트 총리로 살면서 요셉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80여 년 동안 이집트 총리를 했는데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바로 왕의 명령으로 이집트 신을 섬기는 제사장 딸과 결혼을 해야 했고, 이집트 이름도 하사 받아야 했습니다. 정통 유대교나 보수적인 기독교의 눈으로 볼 때 이런 요셉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주일 성수를 못하고, 수요 예배나 금요 철야 기도회에 자주 빠진다고 하나님도 요셉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거나 전도를 잘 하거나 교회 안 빠지거나 십일조 잘 하는 것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오로지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이들을 주님처럼 돌본 이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요셉을 공부거나 묵상하며 우리는 이 진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의 역설
요셉 이야기는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첫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하나님께서 위기 때마다 꿈, 환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경고하고, 건져 주고, 축복을 약속했음에도 실수와 오점을 많이 남겼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한 번도 하나님이 자기 모습은커녕 음성 한 번 들려주지 않았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과오나 흠을 남기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 어떻게 확신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신, 구약 성경에 이런 인물 결코 흔치 않습니다.
요셉을 단편적으로 보면 너무 완벽해서, 우리와 다르게 너무 흠이 없게 평생을 산 사람이라 정이 안 갑니다. 하지만 요셉이 한국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십중팔구, 방언도 못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증할 만한 간증 거리도 없는 신앙인이었을 겁니다.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 음성을 들어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죽을 병을 고쳐 주었다는 간증 거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셉은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 그러니까 술과 빵 담당 이집트 고위 관리의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혀 쫄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0장에서 요셉은 빵 맡은 고위 관리에게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을 옆에서 듣는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습니다. 창세기 40장 19절을 읽습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만약 요셉의 확신과 달리 3일 뒤 빵 굽는 고위 관리가 파라오 대왕에게 죽지 않는다면? 그럼 요셉은 죽음 목숨이겠지요. 그걸 알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창세기 41장에 등장하는 요셉은 숨이 막힐 정도로 극적입니다. 입 한 번 함부로 놀렸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바로 왕 앞에서 요셉은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왕의 꿈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고, 7년 흉년에 살아 남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요셉이 드러내는 하나님에 관한 확신은 눈이 부십니다.
대체 요셉은 평생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 한 번 보지 못하고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고 환상을 보지 못하기로는 우리와 요셉이 다를 바 없는데 우리는 왜 요셉처럼 바위처럼 당당한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3.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셨나?
한국교회에서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이 요셉하면 꿈부터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대제국 이집트 총리가 돼 하나님 앞에서 평생 흐트러짐 없이 살 수 있던 이유가 17살 때 꾼 꿈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정말 그게 맞는 성경 해석일까요?
첫째, 창세기 37장이 소개하는 요셉의 꿈에는 하나님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꿈을 꿀 때든 깨고 난 이후든 그의 꿈을 해몽해 준 적이 없습니다.
둘째, 요셉은 자기가 꾼 꿈 내용만 이야기했습니다. 그 꿈이 이집트 총리가 될 꿈이란 이야기를 요셉은 평생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습니다. 요셉이 자기 꿈을 두고 한 말은 창세기 37장 7절과 9절이 전부입니다. 먼저 7절입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다음은 9절입니다.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셋째, 요셉이 꾼 꿈 해몽은 형들과 아버지가 했습니다. 요셉의 첫 번째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기 37장 8절입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요셉의 두 번째 꿈 이야기에 형들 반응은 이랬습니다. 창세기 37장 10절입니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이 꿈을 꾸고 22년 뒤 요셉은 이집트에서 형들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 온 것은 형들이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냈다고 말입니다. 요셉이 극심한 7년 흉년에서 온 세상을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지 17살에 꾼 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걸 잊거나 착각하면 안 됩니다.
4.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
오늘 본문 말씀은 117일이나 걸린 야곱의 장례식 이후 야곱의 12형제 사이에 벌어진 일을 소개합니다. 야곱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자 형들은 37년 전에 요셉을 죽이려고 웅덩이에 처넣었다가 이집트 노예로 팔아 버린 일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형들은 젊었을 때 외할아버지 라반이 아버지 야곱을 죽이겠다고 득달 같이 쫓아왔던 그 공포의 순간을 잊지 못했나 봅니다. 큰 아버지 에서가 야곱 일가족을 죽이기 위해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오던 때의 불안과 두려움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형들은 큰 아버지 에서보다 자기들이 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살기 위해 집단 행동을 하였습니다. 창세기 50장 16절 이하입니다.
"총리 각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저희 열한 형제를 불러 놓고 당신의 말씀을 총리 각하 아우님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아버지 유언을 언급한 형들의 말은 100퍼센트 거짓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모두 형들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합니다. 사람을 보내 살려 달라고 뜻을 요셉에게 전했는데 반응이 없자 다급해진 형들은 직접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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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아우님., 우리를 종으로 부리든지 가나안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아우님의 조카들과 형수님들을 보아서라도 목숨만은 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요셉은 다시 울었습니다. 17년 전에 하나님의 선함과 인도하심을 그렇게 눈물로 설명했는데 아직도 자기 진심을 헤아리지 못한 형들 때문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이 형들 때문에 여덟 차례 울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요셉의 눈물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눈물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이스라엘 사람과 이집트 사람이라고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서는 요셉의 눈물의 의미를 성과 속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5. 왜 눈물의 사람 요셉인가
창세기는 요셉이 38살부터 56살까지 흘린 눈물만 보여줍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눈물 흘릴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섯 살쯤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불구가 되셨습니다. 큰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수백 명을 거느리고 출동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살기 위해 몇 그룹으로 나눠 대응하는 걸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다른 누나 디나는 세겜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그 일로 형들은 한 족장 마을 남자들을 몰살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런 일을 겪으며 흘렸을 법한 요셉의 눈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은 요셉의 눈물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부터 나치 정권의 몰락 직전까지 장편 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 을 썼습니다. 토마스 만이 이 장편 소설을 쓴 것은 유대인 600만 명을 비롯하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살육한 히틀러의 저 끔찍한 야만을 되돌릴 힘을 요셉의 눈물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성공 신화에 사로잡혀서 요셉의 꿈이나 비전을 강조할 게 아니라 요셉의 눈물과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현승은 슬픔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형들이 살려달라는 애원을 들었을 때 흘린 요셉의 눈물은 야곱의 형제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등등의 말들을 합니다. 요즘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목사, 신부, 스님들도 저런 말을 스스럼 없이 합니다. 그렇게 치자면 야곱의 열 아들만큼 고쳐 쓸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역경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새빨간 거짓말을 이용해 집단 살인을 하더니 동생 요셉을 죽이기 위해 형제들이 공모했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며 가짜 피를 바른 요셉의 옷을 아버지에게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이집트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열한 번째 아들은 짐승의 밥이 됐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랬던 형들을 변화시킨 것은 요셉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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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교회는 창립70주년을 맞이하여 11월을 창립기념의 달로 정하고 특별설교를 요청했습니다.
이번 주는 [요셉의 회상]작가인 '지강유철'선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