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주일(20250615)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잠언 8:1-4
로마서 5:1-5
요한복음 16:12-15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어렵게 여기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셋이라 하는지,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어떤지 머리로 이해하려 하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논리로 파악할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삶에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는 성부 하나님이라 하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성자 예수님과 동행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표현은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 일상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잠언 8장을 보면, 지혜가 네거리와 성문 어귀, 마을 입구에서 외치고 있다고 합니다.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일상의 거리에서, 누구든 들을 수 있도록 외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의 외침이 모두에게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지혜의 소리가 아무리 크게 울려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신념이 옳다고 굳게 믿고, 그 외의 목소리는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입니다. 여기에 빠지면, 오히려 진실한 말씀이 들려올수록 더 강하게 자기 생각을 고집하게 됩니다. 예컨대, 내 생각에만 사로잡힌 사람은 누군가 사랑의 조언을 건넬 때조차 비난으로 듣습니다.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귀에는 사랑도 소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이 확증편향은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내 고정관념과 신념이 너무 강하면 그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귀를 닫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들으려는 소리만 듣습니다. 같은 소리가 들려도 누구는 음악을, 누구는 소음을 듣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의 소음 속에서도, 혼자 누운 방 안의 고요함 속에서도,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입니다.
■ 묵상의 의미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묵상이란 단순히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미 내 삶에 와 있습니다. 다만 내가 아직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라는 찬양은 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곧 나를 주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단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나 자신을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얼마나 갖습니까?
■ 환난 속에서도 심어지는 희망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고난은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그는 오히려 ‘환난을 자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에 새깁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로마서 5:3–5)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봅니다. 성령은 단지 곁에서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은 환난 중에도 인내하게 하고, 인내는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며, 그 단단함은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낳습니다. 희망은 상황이 좋아져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기독교 신앙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안에 내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희망은 결국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 사랑은 타인을 향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위선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 채우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받아들이고 품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심으신 생명의 씨앗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믿고,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2–13)
이 말씀은 제자들의 둔함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과 준비되지 않은 상태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한 번의 이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천천히 여물어가는 여정입니다. 문제는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 다 된 줄 알고 멈추는 신앙입니다. 더 자랄 게 없다고 생각하고, 말씀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며, 기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신앙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실제로는 성장을 멈춘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완전에 이를 수 없지만, 그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동행자가 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않으시며, 오늘의 맥락 속에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성령
성령은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진리를 살아내도록 힘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관계 속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사랑의 영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론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예수는 우리 가운데로 오셨으며,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살아가십니다. 이 셋은 서로를 향해 계시고, 동시에 우리를 향해 계십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그 사랑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견디게 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곁의 하나님’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은 그 곁에서, 말씀이 삶이 되도록 도우시며, 우리가 버티고, 용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숨결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는 지금,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은 지금 여물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다 된 줄 알고 멈추었습니까?
삼위일체는 멀리 있는 신학 이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그 말씀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부르시고, 견디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걸어가는 이 여정 속에서, 그분은 언제나 동행자로 계십니다.
[거둠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서게 하시고 당신의 깊고 따뜻한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이미 내 안에 오신 말씀을 깨닫는 묵상의 은혜를 주옵소서. 환난 속에서도 우리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시고, 버틸 힘을 주시는 성령의 숨결을 느끼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시작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아직 다 여물지 않았으나 여물어가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인도해 주시고, 오늘도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다듬어 주소서. 삼위로 역사하시며,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그 사랑의 동행 안에 우리의 하루하루가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