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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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11주] 가장 귀한 제물

  • 관리자
  • 2024-11-10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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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제11주(성령강림 후 제 25주)
가장 귀한 제물 제목을 클릭하시면, 실황음성 설교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
룻기 3:1~5, 4:13~17
히브리서 9:24~28
마가복음 12:38~44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동지까지는 점점 해가 짧아지다가 동지가 지나고 나면 밤이 점점 짧아지겠지요. 해의 높낮이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예, 그림자입니다. 어릴 적에는 해질녘에 해를 등지고 한껏 길어진 그림자를 보면서 ‘나도 빨리 저렇게 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빛을 통과하지 못하는 어떤 물체가 있어야 그림자가 있는 것이고, 그림자의 모양은 물체의 모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그림자와 물체 중에서 본질적인 것은 ‘물체’입니다. 그림자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체가 아니기에 본질이 아닙니다.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데아를 설명하는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는 아주 유명한 비유입니다.
동굴 속에 갇혀서 쇠사슬에 묶여 한 방향밖에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누군가 조작한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평생 그것만 보아왔으므로 그것을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쇠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와 보니 그동안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갖 동물들과 나무와 해와 구름을 본 후, 너무 기뻐서 동굴 속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돌아가 동굴바깥의 세상에 대해 알립니다. 그러자 동굴 속에 갇혀있는 이들은 그 사람의 말을 비웃을 뿐 아니라, 헛소리를 한다고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동굴 안쪽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삶에 만족해합니다. 플라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자에 불과한 현세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이 우화를 통해 비판하는 것입니다. 현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데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그림자만 보고서는 다 본 줄 알고 멈춥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지 말고 신앙의 본질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그림자에 머물고 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전하시다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 참 성소로 들어가신 예수님(24)


새번역에서 ‘참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손으로 만든 성소’라는 히브리서 9장 24절의 해석은 개역성경에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24절의 말씀을 풀면, 예수님께서는 참 것의 모형이나 참 것의 그림자인 ‘이 땅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참 성소’ 즉,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셔서 하신 일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소에서도 대제사장들에 의해 희생제물이 드려지는데, 해마다, 절기마다 반복해서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복적인 희생 제물이 아닌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을 드리신 것입니다. 번제물이나 소제는 인간의 죄를 동물들에게 씌워 자신의 죄를 씻는 방식이므로 그, 제물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었다는 의미로 ‘희생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의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동물로 드리는 희생제물은 반복해서 드려야 하지만, 참 성소에서 예수님이 희생 제물이 되신 후에는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희생제물’은 드려졌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희생 제물에서 봉헌으로


구약시대의 제사는 복잡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했습니다. 주변 나라들도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희생 제물을 드렸는데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드렸습니다. 희생제물은 죽이고, 갈라서,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 드리는데, 아이들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잔인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를 생각해 보면 구약 시대에는 인신 제사도 제사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동물들을 제물로 바쳤고, 한꺼번에 동물 천 마리를 바치는 일천번제도 종종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바치려면 죽이고, 태우고 하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법전대로 동물들을 제물로 바치려면 제사장들은 도축업자가보다 칼을 더 잘 다뤄야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쪼그라들고, 마침내 강대국의 속국이 되고, 성전도 파괴되고, 귀향해서 재건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보니 이전보다 축소해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를 보면 이전과 같지는 않지만 동물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든지, 오늘의 성서일과인 마가복음 12장을 통해서 동물로 드리던 제물이 ‘돈’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에는 헌금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 예배와 제물의 관계(25)


우리는 예배라는 단어를 교회의 모임 여기저기 붙여서 사용합니다만, 과거에는 ‘예배’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되려면 ‘제물을 드리는 것’ 포함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후찬양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예배 등등 모임마다 ‘예배’라고 하지만, 제물을 드리지 않기 때문에 집회, 모임, 기도회 등을 붙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모임은 쉴 수 있어도, 주일 예배는 꼭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예배일까요?
제물을 준비하는 순간부터가 예배입니다.
주일이 되기 전에 미리 봉헌할 예물을 준비하고,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일정 등을 조정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며 이번 주일 성서일과를 묵상합니다. 저희 교회는 홈페이지에 설교문이 미리 올라와 있으니 미리 읽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주일예배 10분 전에는 오셔서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에 집중합니다. 축도를 마치면 예배가 끝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직도 남은 예식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제사를 드린 후, 제물은 어떻게 했을까요? 제사장들의 몫으로도 나눴지만,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 나눠 먹으며 친교를 나눴습니다. 제물이 풍성할 때에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나눴습니다. 개신교회에는 이것이 ‘공동식사’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후 공동식사를 나누며 친교를 나누는 것까지도 예배입니다. 사람들끼리 친해지려면 ‘밥상공동체’는 필수입니다. 제가 공동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 사람에게 정해진 일(27)


27절 말씀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합니다. 
신과 인간의 차이중 하나가 ‘영원성과 유한성’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고 수많은 시도를 하지만, 사실 이 유한성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오히려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는 끝나는데다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주어진 오늘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은 아니라도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죽음’을 묵상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12월 말, ‘싸나톨로지스트’ 과정을 마치고 ‘죽음전문가자격증’을 딴 후에 천천히 이 문제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 이신득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잘 지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힘써야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율법학자들처럼 착각의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8)


예수님은 첫 번째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그림자를 통해 예수님의 존재를 가늠할 뿐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그림자를 비추는 성경, 자연, 사람, 일상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닙니다.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은 종말의 때에 주님의 강림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각 개인에게 종말의 때는 언제입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27절의 말씀과 연결시키면 ‘죽은 이후에 심판이 있는데 그때 주님께서 거기에 나타나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왜, 나타나십니까? 심판장이신 하나님께 “저 이는 살아생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살던 사람입니다.” 보증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가장 귀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귀한 자신을 제물을 드린 예수님께 예배하는 우리는 어떤 제물을 드려야겠습니까? 오늘 성서일과 마가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소개합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고 드릴 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가장 귀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거둠 기도]
십자가 보혈로 죽음의 어둔 골짜기에 거하던 저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하오나, 그 깊은 사랑의 빛을 보지 못하고, 그림자가 전부인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고, 허망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 그림자 너머의 하나님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하시고, 매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이를 확증하며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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