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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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10주] 둘째 계명이 가장 큰 이유

  • 관리자
  • 2024-11-0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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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제10주(성령강림 후 제 24주)
둘째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 이유(제목을 누르시면 실황설교 mp3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편 146편
룻기 1:1~18
히브리서 9:11~4
마가복음 12:28~34
 

 

어느새 11월입니다.
11월을 맞이하는 날, 아일랜드 출신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알려진 ‘우물쭈물 살다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라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묘비명은 원문그대로 해석해 보면 ‘내가 충분히 오래 머물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입니다. ’우물쭈물 산 것‘이 아니라, 1856년에 태어나 1950년 품수된 96년의 삶을 살았으니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오래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묘비명을 언제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을 정리하던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 여러분은 어떤 묘비명을 남기시겠습니까?


제가 매주 토요일 ’싸나톨로지스트 세미나‘에 참여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싸나톨로지스트는 ’싸나- 죽음, 로지 – 로고스 – 스트-접미사‘로 ’죽음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 정도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 세미나 시간에는 ’유언‘에 관한 세미나를 했습니다.
재산 상속에 관한 법률적인 것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유언장이 법정효력을 가지는 나이가 17세부터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7세부터 유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고,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죽음‘을 묵상한다는 의미겠지요.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묘비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20대에도 묘비명을 작성한 것 같은데 결연했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묘비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써야 한다면,
’이 묘비명을 본 당신도 죽을 것이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라.‘일 것 같습니다. 물론, 수정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묘비명을 남기시겠습니까?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담아 묘비명에 남기지 않겠습니까? 


■ 기독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단어


이런 생각 끝에 성경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를 묵상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어 ’사랑‘입니다. 참 좋은 단어입니다.

이해만 잘하면, 참 귀한 소중한 단어입니다.
잘 깨달으면 아주 귀한 단어지만, 깨닫지 못하면 ’스토커‘가 될 수도 있는 단어요, 잘 깨달으면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을 요약하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해석한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단어는 ‘사랑’이며, 기독교의 정수를 담은 문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입니다.


■ 서기관(율법학자)의 질문


이런 이야기가 시작된 이유는 예루살렘 숙청사건 이후,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율법학자, 대제사장, 장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셨습니까?“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소작인 비유’를 통하여, 자신을 죽이려하는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고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을 했지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십니다. 비난하는 자들이 놀라 탄성을 지를 정도의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의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꾸짖습니다. 

이 모든 변론을 지켜보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알고’라는 말을 통해서 질문하는 율법학자가 안목이 있다는 것, 반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입니다.
 

■ 쉐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먼저, 여기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계명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첫째 계명’은 으뜸가는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그 계명은 대충 지키면 안 됩니다. 마음(카르티아)을 다하고, 목숨(프쉬케)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을 다하고, 힘(이스퀴스)을 다해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3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가 ‘마음을 다하고 지혜(이해력)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목숨과 뜻이라는 말 대신 ’지혜(쉬네시스)를 다하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통해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의 언어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되 왜곡되지 않게 말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합니다. 이웃사랑을 예배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말씀을 읽을 때나, 메시지를 들을 때 이렇게 지혜롭게 자기의 언어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야 ”쉐마, 이스라엘!“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다른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못마땅해서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인데, 이 율법학자는 ”선생님이여 옳소이다.“하며 맞장구를 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 힘이 되었을까요, 안 되었을까요? 분명히 힘이 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미심쩍어하고, 심지어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는 가운데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매주일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의 생각과 지향점이 다른 말씀을 전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표정을 보면서 어떤 때는 힘이 쫙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목사님, 옳습니다.“하면 힘이 납니다. 설교자로서의 고민 중 하나는 ’청중의 마음에 드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냐?‘입니다. 물론, 청중의 마음에도 들고, 하나님의 마음에도 드는 설교를 하면 좋겠지만, 늘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의 메시지가 걸리면 율법학자처럼 지혜롭게 자기의 언어로 순화시켜서 말씀을 받고, 마음에 합한 말씀이 있으면 ”목사님이 옳습니다!“ 해주시면 저도 힘이 나겠죠.

저는 지금껏 목회자의 양심을 가지고, 손해를 보더라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며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실 손해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곁에는 언제나 ”목사님이 옳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첫째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입니다. 첫째는 으뜸이요,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방금 앞에서는 ’하나님 사랑‘을 최고라고 하시더니만, 이제 ’이웃 사랑‘ 제일 크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보이는 이웃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합니다. 하지만, 보이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이 제일 큰 계명이 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은 첫째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 너를 사랑하듯


그런데 사실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이기적인 사랑, 자기만 아는 사랑,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결국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서 자기를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자기 존재'를 내세우면서 타자를 거부하고 말살하는 것은 모든 다른 악의 근원이 되는 '근본 악'이라고 했습니다. 타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는 행위는 근본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원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이웃사랑과 자기 사랑은 하나요,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또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첫째 계명이요, 가장 큰 계명이요, 제일 큰 계명인 것입니다. 

둘째 계명은 첫 째 계명은 아니지만,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사랑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곧 겨울이 올 것입니다. 추우면 더 서러운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시고, 나눔의 손을 펴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거둠 기도]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이웃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또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 깨달은 바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게 하시어,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항상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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