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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9주] 아버지

  • 관리자
  • 2024-10-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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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제9주(종교개혁주일 4)
탕자의 귀향(4)- 아버지(제목을 누르시면 음성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24, 29~32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달을 맞이하여 <렘브란트와 헨리 나우웨과 함께 하는 ’탕자의 귀환‘>을 다뤘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에게 전한 말씀입니다.
 

■ 렘브란트, 그리고 아버지


렘브란트의 작품은 너그러운 아버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그린 마지막 유작입니다. 이. 그림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인간에 대입해 그린 그림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렘브란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데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을 선택했습니다. 렘브란트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후 ’시력을 잃은 이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빛이 퇴색되면서 내면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때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지만, 말년에 점차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처럼 변한 것입니다. 
 

■ 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손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20).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온 아들 앞에 말없이 눈물지으며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그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손을 보십시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억세 보입니다.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른 손은 아주 딴판입니다.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 같습니다. 평론가들은 여성적인 오른 손이 비슷한 시기에 그린 <유대인 신부>의 손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렘브란트는 의도적으로 한 손은 아버지의 손으로, 한 손은 어머니의 손으로 그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은 부여잡고, 어머니의 손은 쓰다듬습니다. 아버지는 확신을, 어머니는 위안을 줍니다.

대체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에 익숙하지만,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저는, 그냥 아버지나 어머니를 붙이지 말고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표현한 곳도 많지만, 어머니처럼 표현한 곳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 아버지의 붉은 외투


아버지가 입고 있는 큼지막한 붉은 외투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붉은 외투에서 장막의 이미지도 보았지만,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 새의 날개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는 행위‘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모아 품어주시길 원하십니다. 남은 것을 우리가 그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이 아닙니다. 집에 있었지만, 먼 지방으로 떠났던 아들과 다름이 없었던 맏이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아버지의 품에 안기려면


 

하나님이 품에 안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킴,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이기 때문에 지을 수밖에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다른 생명의 희생을 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알면서 짓는 죄도 있고, 모르면서 짓는 죄도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죄는 ’모르면서 짓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줄 모르면 회개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기 때문이고,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짓는 일이 정의 혹은 신앙이라는 가면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식에 빠져 살면 안 되지만,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돌이킬 수 있고, 돌이키는 이들을 하나님은 아버지의 품에 안아주십니다.
 

■ ’품수(稟受)된 명(命)‘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큰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맏이를 무시한 적도 없습니다. 기쁨이 너무 커서 잔치를 시작했지만, 큰아들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함께 잔치에 참여해 즐거워하자고 소맷부리를 잡아끕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아들을 비교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와 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 부추김에 넘어가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품수(稟受)된 명(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계획을 창세 전에 가지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1장 3~5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하지 말고, 품수된 명을 살아가십시오.
 

■ 위대한 신앙의 신비


큰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두 아들 모두에게 달려갑니다. 형과 아우를 모두 사랑했으며, 두 아들이 한 상에 앉아 즐기기를 소망했습니다. 됨됨이는 다르지만, 아버지에게는 똑같은 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안아주시기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를 이해하려고 하셨으며,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도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이 반드시 찾고 싶어 하시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십시오. 잘났든 못났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아버지가 되라는 소명


이제 종교개혁의 달 특집을 마무리해야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탕자이기도 하고 큰아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집에 돌아온 자식들을 환영하고 잔치를 여는 아버지가 되라는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못을 뉘우치는 아들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되는 첫 걸음이며, 용서하고 화해하고, 손을 내밀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아버지가 되는 첫 걸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탕자의 귀환‘을 묵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자라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어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것을 상속 받은 상속자는 아버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아버지가 하는 일


아버지가 하는 일은 지배, 권력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자식이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한 일은 탕자를 향한 슬픔, 무조건적인 용서, 전제조건이 없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준 것입니다.

탕자임을 깨달았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지도는 ’산상수훈‘이며, 그 길을 걸어갈 때에 힘을 주는 묘약은 ’감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키워가려면 ’슬픔, 용서, 너그러움‘이라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 아들이 아버지로 변해가는 기적이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거둠 기도]
하나님, 우리는 탕자였고, 큰아들이었습니다. 아니, 여전히 탕자이고 큰아들입니다. 하오나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시어 아버지처럼 살아가게 하옵소서. 교회를 떠나 신앙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슬퍼하게 하시고, 우리를 서운하게 한 이들을 용서하게 하시고, 모든 이들을 너그럽게 품을 수 있는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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