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주일설교모음

[창조절 8주] 큰아들(ppt실황설교포함)

  • 관리자
  • 2024-10-20 11:00:00
  • hit1614
  • 222.238.137.14

https://youtu.be/mz_ktURjwdc
창조절 제8주(종교개혁주일 3)
탕자의 귀향(3)- 큰아들
누가복음 15:25~32


탕자의 귀향 세 번째 시간입니다.
먼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여섯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앉아있는 사람, 서있는 사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여인 둘입니다. 좌측에 있는 한 여인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불만 가득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는 큰 아들이고, 자리에 앉은 채 가슴을 치며 돌아온 작은 아들을 바라보는 이는 죄인과 세리를 상징합니다. 밝은 곳에 있는 여인은 자주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인데 자주색 옷은 무자들이 입던 옷이므로 아버지의 첩이거나 큰 아들의 부인으로 보입니다. 어두운 곳에 있는 여인은 이목구비를 통해서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기둥에는 포도덩굴 아래서 피리 부는 사람이 조각되어 있어서 곧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념으로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작은 아들


지난 시간에 작은 아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2023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자살사망통계 발표에 의하면, 자살률은 10만 명당 27.3명으로 13,978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다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단과 용기로 살아가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분신과 투신을 이어갔습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분신과 투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문익환 목사님이 저희 학교에 강연을 오셔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절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마십시오. 그 용기로 싸우십시오. 목숨을 걸고 싸우십시오.”

그렇습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우리를 품어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죽을 각오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만해 질 것입니다.
 

■ 큰 아들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입니다.
사실, 큰 아들은 비중이 낮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귀향을 소재로 한 미술작품 중에서도 ‘큰 아들’이 등장하는 예는 상당히 드뭅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큰아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당대의 화풍을 뛰어넘었습니다. 큰아들의 시선은 아버지를 향해 있습니다. 그의 두 손은 모아잡고 있어서 동생에게 손을 내밀 생각이 없으며, 표정에서도 기뻐하는 구석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한사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한 겁니다. 

나우웬은 그래서 이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자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먼 지방으로 떠났던 아들뿐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큰 아들 역시도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한 것 같지만, 속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동생이 부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집을 떠나 방황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처럼 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동생을 향한 분노와 동생을 안아준 아버지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 잔치를 연다고 하니 자신과 비교하면서 시기하는 모습 등은 집 떠난 ‘탕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 복음을 배척함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처럼, 당시에 잃을 양을 찾아 나선 예수님,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종일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에 보면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하며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세리 삭개오와 관련해서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이야기는 민수기 14장에도 등장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광야에서라도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민 14:2)”라고 항변합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못 살겠다 아우성을 치고, 그 소리를 들으시어 해방시켜 주시고, 약속의 땅 목전에 서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못마땅하게 여겨 배척한 것처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듥도 예수님의 복음을 못마땅하게 여겨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큰 아들도 ‘복음’을 이렇게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 앞에서 큰 아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 겉으로는 거룩하지만


작은 아들은 누가 보아도 엇나간 길을 걸어간 탕자입니다.
인륜을 저버리는 불효를 저질렀고, 허랑방탕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너무 명명백백해서 잘잘못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작은 아들은 깨닫고 돌이켰으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정도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큰 아들의 잘못은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르다고 할 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고분고분 순종했고, 효도를 다했고, 규율도 지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들 큰 아들을 모범의 전형으로 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용서하고, 잔치까지 베풀어 준다고 하니 본심이 드러납니다. 마음 깊이 숨어있던 분노와 오만함과 몰인정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을 하던 자신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안아주시며, 복음을 전하시니 본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섭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 남은 건 아픔 뿐, 기쁨이 없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북치고 장구 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집안에 경사가 났음은 알겠는데 뭔가 미심쩍습니다. 그러니 직접 가서 보지 않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물어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큰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버지에게 그동안 서운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도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못마땅하고, 불만 가득한 어조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잔치에 참여한들 그 마음이 기쁠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집 밖에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생각할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를 하던 하지 않던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후에 큰아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어떤 탕자라도 안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 저마다 대답해야할 질문


이 이야기의 발단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2)”고 못마땅해 하며 비난하자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들,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기꺼이 죄인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을까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실 엄청난 도전입니다. 
제 아무리 거룩한 신앙생활을 했어도, 큰 아들처럼 잘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정작 하나님 나라잔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탕자라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탕자와 같은 자아를 고치는 일보다, 큰아들 혹은 바리새인과 같은 자아를 고치는 일이 더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논리로, 인간의 깨달음으로 우리의 자아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손 내밀어주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고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대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묘약은 바로 ‘감사’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산상수훈이듯, 못마땅한 마음과 불만으로 가득 찬 마음을 씻어내는 묘약은 ‘감사’입니다. 작은 일에도, 범사에, 아무 일도 없음에도 감사합시오.
 

[거둠 기도]
주님, 탕자와도 같은 우리를 안아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차가운 마음을 가진 큰아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이 불평과 불만이 아닌 감사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함께 기뻐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실황설교듣기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