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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7주] 아들(종교개혁의 달 특집 2)

  • 관리자
  • 2024-10-1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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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제7주(종교개혁주일 2)
탕자의 귀향(2)- 아들

누가복음 15:12~21


탕자의 귀향 두 번째 시간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렘브란트는 말년에 육신의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지지만, 내면의 눈을 점차 뜨게 되면서 1668년 마지막 유작 ‘탕자의 귀환’을 완성하고, 1669년에는 ‘시므온과 아기’를 그리지만 완성시키지는 못합니다.




‘시므온과 아기’ 그림과 ‘탕자의 귀향’을 보면 어린 아기를 안은 시므온의 모습과 탕자를 껴안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육신의 눈은 거의 감겨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제 자신의 삶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집을 나간 탕자와 다르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본향으로 돌아가 하나님 품에 안기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 작은 아들 집을 나서다


‘돌아옴’은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 ‘되찾는다’는 말 뒤에는 ‘잃어버렸다’는 경험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입고 있는 황갈색 옷은 아버지의 붉은 외투와 어우러져 제법 근사하게 보이지만, 탕자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누더기 옷입니다. 

누더기 옷을 입기 전에 아들은 “재산 가운데서 내 몫을 주십시오!” 요구하고, 재물을 챙기기가 무섭게 처분하여 싸들고 집을 나갔습니다. 이것은 당시 도덕률을 정면으로 짓밟는 처사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재산을 상속할 수 없었고, 부득이하게 상속한 경우라도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재산을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아들은 지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재산을 처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가출은 생각보다 무례한 짓이고, 잔인한 짓이며, 자기를 키워준 가정을 내동댕이치는 처사이며,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전통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 먼 지방으로 가서


‘먼 지방’은 단지 물리적인 거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거룩하게 여기던 것들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곳입니다. 즉 ‘영적인 가출’상태를 의미합니다. 집을 나가서 먼 지방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품으로부터 떠나 마치 집 없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머물 곳을 구하듯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은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집은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마”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내 존재의 중심,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다른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면, 집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가 있는 탕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예수님에게도 거룩한 자녀들에게도 한결같은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무서워하지 말아라.” 먼 지방으로 갔을 때에는 이런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두 손을 탕자의 어께 위에 올려 놓고 품에 안아주십니다.
 

■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헨리 나우웬은 하루하루 사는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보다는 세상에 속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누가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화가 나고, 별것 아닌 거절에도 상심하고, 의미 없는 칭찬에 화색이 돌고, 사소한 성공에 흥분합니다. 돈 많고 힘 있으며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의 생존 경쟁에 몰두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서 “나 사랑해, 정말 날 사랑하는 거지?” 묻고 확인하면서 세상에서 참다운 자기를 찾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든 관심이 세상에 쏠려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탕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헨리 나우웬만의 문제일까요?
우리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단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준 선물들을 싸들고 ‘먼 지방’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소비해버리는 탕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본향은 하늘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내키는 대로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지금도 팔을 내민 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작은 아들, 다시 집으로


아버지가 안아준 탕자는 한심하고, 형편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거드름을 피우며 한몫 단단히 돈을 챙겨 집을 떠났고, 먼 지방에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돈도, 건강도, 체면도, 자존감도, 명예도 모조리 탕진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머리를 보십시오. 굽이치는 머릿결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머리칼이 잘려나간 죄수의 머리와 같습니다. 머리칼이 잘려나갔다는 것은 개개인을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군대가 대표적입니다. 과거 중고등학교시절에도 그랬습니다. 군대문화, 군국주의는 개개인의 구별되는 특성,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작은 아들은 겉옷도 없이 너덜너덜한 황갈색 속옷으로 겨우 몸을 가렸고, 닳아빠진 신발마저도  벗겨진 왼발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남아있는 품위의 상징이라고는 달랑 엉덩이에 매달린 단검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단검이 ‘부자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만, 아마도 이 단검은,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여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자했던 도구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문화에서 은장도 같은 용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이제 하인의 신세만도 못합니다. 종의 신세나 다름이 없게 된 것입니다.
 

■ 철저한 소외, 그 깊은 괴로움


‘먼 지방’에서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가출의 결말이 어찌될지는 애당초 불 보듯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멀리 떠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더 어려워지고, 그럴수록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집에서 멀리 있는 불안감을 잊지 위해 먼 지방에서 호감을 얻고,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다들 탕자를 떠받드는 것 같았지만, 빈털터리가 되고 더는 뜯어갈 것이 없자 곧바로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작은 아들은 인간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철저하게 내쳐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죽음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이 아닌 대안을 찾았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만이 지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 다시 찾은 아들의 자리


사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언제나 아들이었습니다.
무례하게 제 몫을 달라고 했든, 재산을 처분해서 먼 지방으로 떠났든, 허랑방탕하게 살았든,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라도 얻어  먹으려는 비참한 삶을 살았든 그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에게 그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천하의 쓸모없는 인간이니 종으로나마 삼아주시면 감지덕지하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탕자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 실패했을 때, 탕자처럼 빈털터리가 되어 돼지가 먹는 것이라도 얻어먹고자 해도 그것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모든 끈을 끊어버리고, 죽음의 권세에 나를 맡기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난 쓸모없는 인간이야. 무능하고, 보잘 것 없고, 가치도 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이 들면 칠흑 같은 어둠이 엄습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하셨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 하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탕자처럼 살 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아이야!”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만일 아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는 이미 탕자를 받아들여 아들의 지위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시려고 이제나 저네나 기다리십니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여러분 계속 먼 지방에서 탕자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산상수훈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지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인류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렘브란트의 그림은 감동적인 비유를 화폭에 옮긴 삽화가 아니라 구원 역사의 압축판입니다.
 

[거둠 기도]

주님, 우리의 삶이 먼 지방으로 떠나 살아가는 아들과 같은 삶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로지 이 세상의 것에만 취해, 아버지의 음성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옵소서. 집을 떠난 이들이 주님의 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한남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아버지의 집이 되게 하시고, 한남교회를 통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향해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게 하시고, 한남교회를 통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지도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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