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제6주(종교개혁주일 1)
탕자의 귀향
누가복음 15:11~32

시월입니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50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종교개혁의 달에 ‘본 회퍼와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 ‘월터 브루그만과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 ‘리처드 로어와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로 탁월한 신학자들을 신앙고백을 살펴보았습니다. 올해는 신학과 미술을 접목시킨 ‘렘브란트와 헨리 나우웬과 함께하는 종교개혁의 달’로 ‘탕자의 귀향’에 대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귀향’은 많이 알려진 이야깁니다.
그런데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얼핏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숨은 뜻은 간과하고 지나갑니다. 4주간 동안 ‘탕자의 귀향’을 얼핏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뜻을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669년 63세의 나이로 이 땅의 삶을 마쳤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미술의 거장으로 ‘빛과 혼의 화가’로 불립니다. 그의 그림은 탁월한 빛의 처리기법으로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있다고 평가됩니다.
헨리 나우웬도 네덜란드 출생으로 193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1957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노틀담 대학교, 예일대학교,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986년부터 장애인공동체 데이브레이크를 섬기다 1996년 심장마비로 6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많은 강의와 4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이 시대의 영성가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쓴 <탕자의 귀향>과 <상처입은 치유자> 같은 저서는 크리스천 영성 역사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였습니다.
렘브란트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20대 후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스무살 때 만난 사스키아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사스키아는 엄청난 부자이자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결혼 덕분에 귀족들과 연결되어 그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거의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이면에 사스키아에게서 갓 태어난 아이들이 세 명이나 죽고, 사스키아 마저도 결핵으로 30세에 죽은 이후, 몰락하여 파산합니다. 파산 후, 그는 자신의 삶을 깊이 되돌아봅니다.
그런 과정에서 ‘탕자의 귀향’은 1668년, 죽음을 일 년 앞둔 시점에 완성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1766년 그 그림을 사들여서 현재 러시아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도 나름 성공가도를 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제로, 여러 대ㅔ학에서, 하버드 대학에서의 강사로, 저술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 대학시절 완전히 탈진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포스터를 보았고,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배려로 미술관에 며칠 동안 머물며 원작을 마음껏 감상합니다. 그림을 통해 화해와 용서, 내적 치유라는 신비한 사건에 더 깊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접고 지적장애인 공동체 ‘데이브레이크(방주)’에 들어가 장애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느 잠시 머물다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십 년 뒤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공가도를 달리다 탕자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순간에 새로운 삶을 찾은 것입니다. 렘브란트와 헨리 나우웬에게 ‘탕자’는 하나님 나라로 통하는 신비로운 창이었던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내용을 잘 알고 계실 터이니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작은 아들 탕자, 큰 아들, 아버지 중에서 여러분은 누굴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나눌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둘째 아들이 되는 경험입니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는 둘째가 바로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입니다. 자신도 이젠 다 내려놓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친한 친구와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둘째가 자기 같다’고 고백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글쎄, 자넨 도리어 큰 아들과 더 닮은 것 같은데?”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이 큰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수만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여섯 살 때 사제가 되기로 한 이후, 단 한 번도 방탕함과 술 취함에 빠진 적도 없고, 책임감을 가지고 전통을 따르고, 집을 지키며 살았던 큰 아들이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질투와 분노와 완고한 태도와 독선, 적대감으로 가득한 자신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작은 아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버지가 되는 단계입니다. 데일리브레이크 공동체로 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수 모스텔러라는 할머니가 렘브란트의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기는 작은 아들이기도 하고 큰 아들이기도 하다는 고백을 하니 이런 말을 합니다. “스스로 작은 아들이라 생각하든 큰아들로 여기든, 아버지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온 자녀를 반가이 대한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우웬은 자신을 아버지로 보는 훈련을 시작했으며 <탕자의 귀환>을 쓸 무렵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바로 작은 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누굴 닮았고, 한남교회에는 누굴 닮은 사람이 많습니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누굴 닮을 사람이 많아야겠습니까?
요즘 한국교회는 큰 위기 속에 처해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사회시스템 속에서 교회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쇠퇴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이 교회를 등집니다. 이제 교회는 지역의 구심점도 아니고 우리 시대의 문화나 정신을 이끌어가지도 못합니다. 예수는 없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천년 대 초반부터 예수는 없고 바울만 있는 교회였는데, 요즘은 바울도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9월 교단들마다 총회가 있었는데, 들려오는 소식들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소식들입니다.
뭔가 개혁이 필요한데, 성직자들이나 교인들이나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마 11:17)’ 세대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많지 않아도 그루터기처럼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 남은 목회자들 중 하나이길 바라고, 한남교회가 그런 교회이길 소망합니다. 물론, 부족한 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귀향의 ‘귀(歸)’는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본향을 향하여 간다.’고 합니다. 본향이란 원래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본향을 향하여 가는 이들을 ‘순례자’라고 합니다. 순례자들은 이 세상을 ‘나그네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노래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복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처럼 전생의 삶을 이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항해하던 배에서 저 땅을 항해하는 배로 갈아타는 것이고, 배를 갈아타는 순간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십니다.
“뭐하고 살았느냐,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고 그냥 안아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특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부족한 점이 있어도 하나님은 묻지 않으십니다. 그냥 안아주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안에서 든든히 서서 ‘메멘토 모리 – 죽음을 기억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편 49편 12절에 “사람이 제 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씀이 아라 누구나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으로 사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아니라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해야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Es ist gut!”이었다고 합니다. “좋다!”라는 뜻인데, 철학자로서 잘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죽음을 맞이해서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죽음을 맞이한 칸트는 ‘메멘토 모리’를 묵상한 철학자였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달 시월, 남은 3주간 ‘탕자의 귀환’을 깊이 묵상하며, 여러분들 안에 신앙의 개혁을 이뤄내길 바랍니다.
[거둠 기도]
주님, 종교개혁의 달 시월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릇된 길을 갈 때, 목숨을 걸고 진리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 있어 오늘 우리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바른 길 걸어가게 하옵소서. 시월 한 달 동안 ‘탕자의 귀향’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우리의 신앙을 갱신시키는 귀한 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