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14주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
이사야 6:8~13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젠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와 끊이지 않는 전쟁소식과 전염병의 창궐, 이런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지구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과학자들 중에는, 앞으로 26년 뒤인 2050년에는 ‘거주불능지구’가 될 것이라며,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한파, 산불, 태풍, 해일, 해수면상승, 물 부족, 식량고갈, 전염병 창궐로 지구는 거주불능 지역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7분 전으로 시작되었던 지구종말시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90초 남았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전쟁은 이 시간을 더 앞당겼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숭배한 결과요, 물질 숭배는 인간을 무한한 탐욕으로 이끌어 지속적으로 죽음의 길을 향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택하여라!”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끝난 것일까?
이런 암울한 소식을 들으면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이런 물질 숭배의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만일, 다른 모든 희망의 빛이 꺼졌다면, 내가 그 빛이 되면 됩니다. 내가 빛으로 사는 한, 희망의 빛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왜들 저럴까, 저러니까...’하면서 남 탓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스스로 내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내 몫으로 주어진 개인적인 책임을 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나의 일이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적인 삶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만났을 때, 그때 기적과도 같은 일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려고 하니까 나도 힘들고,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있는 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암울한 시대의 빛을 비추는 한 사람, 그 사람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는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에언자로 소명을 받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사촌 동생으로 궁중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고 난 후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부집게로 집은, 타고 있는 숯을 그의 입에 댄 후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역대지하 26장에 기록된 웃시야 왕의 행적에 의하면 그는 16세에 아버지 아마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52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스렸는데 초창기에는 아버지 아마샤를 본받아 주님 보시기에도 올바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은’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 그의 이름이 저 멀리 이집트 땅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런데 힘이 세어지면서 교만해지더니만, 주님의 분향단에 직접 분향을 합니다. 자그마치 팔십 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이 말렸지만, 자기가 제사장이라도 된 듯 행세를 합니다. 그리하여 그때 이후로 죽을 때까지 나병을 앓았습니다. 그런 웃시야 왕이 죽고,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이사야는 예언자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웃시야 왕이 잘 될 때는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묻는 삶을 사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복을 주실 것입니다.
■ 내가 누구를 보낼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냥 마음먹은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결코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일을 하실 때마다 ‘동역자’를 부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을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셨고, 노아를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위해 동역자를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을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하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초월성만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내재성 곧 인간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권면합니다. 칼 바르트는 한때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인간 이성에 대해 무한 긍정하던 신학자였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위기를 느끼고 ‘위기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누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내가 그 ‘누구’이길 바랍니다. 그 ‘누구’이려면 일상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 피리를 불어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그들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통하게 울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눅 7:32)”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조차도 장단이 맞아야 놀이가 이어지는데, 예수님께서 그 많은 징조를 보여주시고 말씀을 전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6장 9절의 말씀을 보면 ‘ 들려주어도 보여주어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예수님께서는 듣고, 보아 깨닫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이 들으려하지 않고,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고,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은 어떨까요?
저는 두 가지가 다 작용한다고 봅니다. ‘들을 귀 있는 자, 보는 눈이 있는 자는 듣고 보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듣고 보았어도,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물신숭배’에 빠져있으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이런 이들은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니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는 이들이 절망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의 기갈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뜻을 알면, 마냥 황홀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 황무지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는 불행한 삶을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의 삶은 이렇게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도 조차도 알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불행하고 황폐한 삶, 황무지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늘의 시대가 기후변화와 물질숭배로 인해 ‘지구멸망 9초전’, 혹은 ‘2050년 거주불능지구’가 도래하니 다 끝났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손을 떠났으니 휴거와 같은 요행이나 바라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냥 체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거룩한 씨는 남아서
하나님은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 그루터기가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사 6:13).”라고 하십니다. ‘그루터기 신앙, 남은 자들의 신앙, 거룩한 씨’를 포괄하는 ‘희망의 신학’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우리의 삶이 힘겨워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 그루터기를 남겨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죽음에서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거룩한 씨’는 남아서 지금도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고, 남은 그루터기에서는 새순이 돋아나고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거룩한 씨를 싹틔울 땅이 있고, 새순을 움트게 하는 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이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가 교회이길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기를 바랍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거룩한 씨앗’으로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주님의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물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방황하며, 때론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길을 잃고 살아갑니다. 하오나 주님, 우리의 일상 속에서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을 싹 틔우는 거룩한 씨앗이 되고 그루터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이 어두운 시대에 희망의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실황 녹음 mp3 / 거룩한 씨앗과 그루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