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10주(20240728)
기적의 단초가 되는 사람
요한복음 6:1~21

선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식사는 하고 오셨는지요?” 제가 어릴 적에만 해도 “진지 잡수셨어요?”가 인사말이었고, 대학 시절 자취할 때 친구들을 만나면 “밥 먹었냐?”가 인사말이었습니다. 간혹 어머님께 전화하면 “밥은 먹고 다니느냐?” 묻곤 하셨습니다. 이런 인사말에는 보릿고개라는 시대적인 상황이 들어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의 인사는 여전히 “밥 묵고 다니노?”라고 합니다. 등록금에 자취방 월세, 책값에 이전에는 없던 통신비까지 감당하다 보면 정작 밥 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떡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이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에도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배고픔이라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 염려의 근원이 먹을 것임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 염려하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일과의 말씀에도 ‘오병이어’를 통해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고 문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종교에서 왜 먹을 것에 관심을 두느냐고 하시기도 하지만, 영과 육의 문제는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인 것이며, 신앙도 그렇습니다. 영과 육의 온전한 합일체, 그것을 동양에서는 ‘몸’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몸을 이루려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작 시기는 1세기 후반입니다.
이 시기는 초대교회공동체에 영지주의가 들어와 초대교회의 신앙을 흐리던 시기였습니다. 혼합주의적인 종교 운동 중 하나였던 영지주의자들은 두 개의 근본원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나누고, 그래서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하늘, 남성, 영혼 같은 것은 선하고 땅, 여성, 육체 같은 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나눕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인간의 육체를 입고 거룩하신 하늘에서 더러운 이 세상에 오실 수 없고, 불멸의 영원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도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희한한 논리로 발전했는데, 하나님이 공생애기간 예수라는 사람의 몸을 빌어 잠시 활동하시다가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하나님의 영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하니 당연히 부활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반론하는 성격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로고스이시고,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공고하게 하고자 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속하지 않았으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도 관점이 다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셨다.”라는 쪽에 관심이 많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활동 모두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오병이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기적 이야기(마14:13~21, 막6:30~44, 눅9:10~17)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섞어서 하나의 이야기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조금씩 다릅니다.
공관복음은 누가복음에서만 그 일이 일어난 곳이 벳세다임을 밝히고, 나머지는 ‘외딴 곳’이라고 합니다. 공통점은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고 건의한 것은 제자들이고, 제자들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12광주리였고, 남자만 5천 명이었다는 숫자도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 일이 일어난 곳은 ‘디베라 바다 건너편’이며,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먹을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물으셨고, 오병이어도 제자들이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한 아이가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그들에게 나누어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나누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도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 디베랴 바다 건너편

디베랴는 주후 20년경에 헤롯 안티파스가 세운 곳인데 당시 로마 황제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세운 신도시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유아를 학살했던 아버지 헤롯대왕의 아들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벤 왕입니다.
디베랴는 오늘날 신도시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당시 신도시를 개발하려면, 강제노역을 해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고, 강제노역은 그 지역에 살던 이들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개발을 마치고 나면 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도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바로 디베랴 바다 건너편은 신도시와 대비되는 곳이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쫓겨난 이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자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산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장소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일이 펼쳐지는 성스러운 곳을 상징합니다. 그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합니다. 유월절 이후, 하나님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서의 ‘빈 들 혹은 외딴 곳’과는 다르게 요한복음에 산과 유월절이 등장하는 이유는 산에서 계명을 주시고,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로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이시듯이 오병이어를 직접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빌립을 시험해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시험에 합격입니까, 아니면 불합격입니까? 예, 불합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은 믿음의 문제를 산술의 문제로 바꿔버렸습니다.
000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치면 적게 잡아도 1만 5천 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먹을 것을 돈으로 환산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200데나리온이 있다고 한들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은들, 그만큼의 빵을 살 곳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의 대답은 합리적이지만, 신앙의 언어와는 괴리감이 있을 뿐 아니라,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가져옵니다.
큰 무리에게 오병이어는 보잘 것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보리 떡은 서민의 음식이요, 가난한 자들의 음식입니다. 보잘것없을 뿐 아니라 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 나눠주니, 원하는 만큼씩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인다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가 단초가 되어 큰 무리를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단초는 ‘일이나 사건을 풀어갈 수 있는 첫머리’입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는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단초가 되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주 커다란 불의가 한 사람의 외침으로 무너지기 시작하고, 깊은 어둠이 촛불 하나로부터 물러나고, 거대한 옹벽이 작은 틈새의 갈라짐으로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작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작은 것을 통하여 큰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안드레는 그 작은 가능성을 주님께 가져가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은 후, 예수님은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라고 하십니다. 왜 그 작은 부스러기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생명의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스러기와도 같은 작은 것들, 그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단초였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돌담을 보면, 큰 돌이든 작은 돌이든 버려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기 자기의 자리에서 돌담이 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단초가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성서일과는 오병이어 기적에 이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하나의 성서일과로 제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묵상하다 이런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만 기적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도 기적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사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알면 감사의 삶으로 이어지고,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매일 경험하며 살지만, 그것을 기적이라 여기지 못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숨어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숨은 신’, ‘없으신 듯 계신 분’, ‘알 수 없는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기적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로 읽는다면 기적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앙 고백적인 상징을 담은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상시인은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기적 같은 일상을 경험한다고 고백합니다.
만물의 그 시원의 빛에 눈을 뜬 나,
이제 새삼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저 영원 속에서 나와 저들의
그 완성될 모습을 떠올리면 황홀해진다.
이 기적은 마음의 눈을 뜨기 전에도 있었던 일상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뜨니 일상 속에서 기적의 신비를 보고 황홀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기적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가 각박해지고, 헛헛한 이야기들만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이 살맛 나는 세상이 되려면 기적의 단초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적의 단초는 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처럼 작은 것이면 충분합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매일의 삶,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 창조주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향한 선한 계획이 있다는 것,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 모두가 기적이 아닙니까? 이런 기적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께 큰 것을 드려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 오병이어처럼 별 볼 일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 단초가 되어 주어진 것입니다. 아니, 드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 가진 것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비교하다 불행해집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시고, 내가 가진 것을 성별하여 주님의 손에 올려주십시오.
그것이 기적을 이루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거둠 기도]

우리에게 매일매일 기적과도 같은 일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 기적과도 같은 일상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 마음의 눈을 떠서 일상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시고, 우리의 가진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 기적의 단초가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작고 보잘것없는 것조차도 귀하게 사용하시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