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20210328)
이후의 깨달음
요한복음 12:12~1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때에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 외치며 환영하였으므로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이 붙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어린 나귀’를 타고서 들어오시는데, 이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에 메시야가 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기록한 것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당시 왕으로 추대되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면 성에 들어올 때에 ‘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개선장군들이 타는 권위의 상징인 말이 아니라, 짐이나 나르는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였으니 여기에 깊은 상징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4월 7일 보궐선거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합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뽑히게 되면, 개각이 있을 터인데, 어떤 사람들이 지방자치 단체장의 수족이 될까요? 후보들 도왔던 참모진들이 한 자리씩 맡게 될 것입니다. 그들만큼 후보를 위해서 헌신했던 이들도 없을 터이고, 후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군중들이 무엇이라 외칩니까?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고 외칩니다. 이때 예수님을 삼 년 간 따랐던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미 이런 여론을 간파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퉜던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나 군중이 생각했던 메시아 왕국의 성취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었으니, 제자들의 다툼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마치 후보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들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이 모든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16)”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깨달음’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늘 ‘이후’의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하는 후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깨달음’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후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깨달음’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어떻게 올 수 있는 것일까요?
김연수 작가는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는 책에서 ‘쓰기’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을 장담할 수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어서 글을 쓰는 존재가 아주 조금씩이라도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풀이한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에서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저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보가 없는 이유는 ‘나름 좋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앙의 진보를 이루려면, ‘내가 그리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영어에서 ‘I see.’라고 하지요.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seer는 보는 사람이요, 한문으로는 先見者(선견자), 먼저 보는 자라고 합니다. 본래는 그냥 ‘보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한문으로는 ‘먼저 보는 자’라고 하니,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앞서 보는 사람을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자(prophet)라고 합니다. ‘앞서 본다.’는 뜻이요, 대언자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깨닫고 전하는 사람들, 그들을 예언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본다는 뜻을 가진 한문은 ‘볼 관(觀)’자입니다. 그런데 觀자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관 자 왼편에 있는 것은 ‘올빼미’를 뜻하는 말인데, ‘새 추(隹)’자 위에 있는 것이 올빼미 눈입니다. 올빼미 눈 위에 나뭇가지가 있지요. 그러니까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올빼미’가 보는 것을 ‘觀’자로 표현한 겁니다. 올빼미는 낮에는 못 보고 어두운 데서 봅니다. 그러서 ‘관’이라는 것은 나타나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지 않는 것,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과 제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속을 보지 못합니다. 속이 보이지 않으니 “이스라엘의 왕이여!” 환호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죽이라 하고 바라바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속을 보지 못했으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정작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순간에 모두 도망을 갑니다.
‘이후의 깨달음’ 물론, 이후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후의 깨달음’을 얻는 이들이 아니라 seer가 되어야 합니다. 올빼미처럼,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그리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의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 자기 신앙이 최고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까? 저도 자기 의에 빠져서 살아온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깨닫습니다. 내가 그렇게 좋은 목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책에 ‘60세는 한 사람을 노인의학의 수혜 대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공식적 기준 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 한 살을 더 먹었을 뿐인데, 한 해가 바뀌었을 뿐인데 저도 공식적으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격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 나이가 돼 봐야만 안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19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줄곧 이 길을 걸어왔으니 목사로는 26년, 교역자로는 33년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사셨는데, 저는 예수님의 전 생애만큼을 교역자로 살았으면서도, 예수님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깨닫지 못한 말씀들이 너무 많아서 때론 비참합니다.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시편 19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일반계시, 특별계시, 개인계시에 대한 말씀을 드렸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말씀을 다 듣지 못하고,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의 말씀이 저의 한탄이 된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깨달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깨닫는다는 것은 ‘제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누구나 다 보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것, 눈이 어두운 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살고, 그로인해 예수님도 삽니다. ‘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자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관심이란,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관심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그 분야의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한 것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셔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이전에 깨달았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 역시도 온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고, 그저 달려갈 뿐이라는 것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어찌 진보가 없겠습니까?
종려주일은 “내가 그리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 이것을 깨닫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깨달음 이후에 우리는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한 주간 동안, 나의 어떤 모습으로 인해 예수님을 지금도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셔야 하는지 겸손하게 묵상하시면서 신앙의 성숙을 이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깊은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보혜사 성령님, 우리를 도우셔서 주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하시고, 자기 의에 빠져 살아가지 않도록 하시고, 주님, 선한 것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모든 불의와 싸우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옵소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길 원합니다. 내 안에 갇힌 신앙이 아니라, 이웃의 삶까지도 돌아보는 넓은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