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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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3주] 성령에 붙들린 사람, 예수

  • 관리자
  • 2024-06-0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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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3주(20240609)
성령에 붙들린 사람, 예수
마가복음 3:20~35



오늘은 성령강림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는 마가복음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 법을 어기시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을 나눴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면 밀을 자른 행위를 두둔하고, 회당 한 쪽에 있는 손 오그라든 사람을 중심에 세우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이 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꾀하기 시작합니다. 이후에는 여기에 사두개인들과 심지어는 군중들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할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될 것을 모르는 바 아닐 터인데,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 화육하신 성자 예수님



‘성령에 붙들린 사람, 예수’라는 제목에 약간 불편함을 느끼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불편함의 원인은 ‘사람’이라는 표현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오셨고, 부활 이전까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화육(incanation)하신 하나님’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셨고, 그 화육은 완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님은 보통의 사람과 다른 어떤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하신 모든 일은 신적인 예수님이 한 일이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만일, 뭔가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도저히 닮을 수 없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내 마음이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다(마26:38).”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고통 속에 부르짖습니다. 철저하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성령의 붙들림, 성령에 대한 전적인 순종, 그것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셨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사셨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사람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삶을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에 붙들린 분들이 되십시오.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예수가 미쳤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을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곱게 미친 것이 아니라, 바알에 들렸거나,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축귀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가족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이 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가족들이 모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예견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들이 로마제국의 형틀 십자가를 이용할 것까지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종교권력에 의해 매장되거나 신성 모독죄로 험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러 온 것입니다.

‘예수의 가족들이(21)’, 여기에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31). 31절에 보면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았던 마리아,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던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잊은 것일까요? 30년 전의 일이니까 그 감격이 사라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생생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을 살펴보면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눅 1:32).”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 예수님의 행동은 마리아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기에 더욱더 옛날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너무 사랑했기에 “예수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는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하지 않겠냐?”이렇게 타이르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 용서받지 못할 죄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자 예수님은 비유로 그들의 공격에 반박하십니다.
“한 나라나 가정이 서로 갈라져서 싸우면, 그 나라와 가정이 버틸 수 없는 것처럼, 당신들의 주장대로 내가 귀신이 들렸다면, 귀신끼리 싸운다는 이야긴데 말이 안 된다.” 여기까지는 좋은 데 문제는 이어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시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어떤 죄나 비방도 다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들은 지금 ‘성령을 모독하는 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하는데,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모독하는 일을 하는 것이 죄이지 ‘예수 = 성령’의 도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오늘 날에도 이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지금도 성령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모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을 모독하는 이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 영원한 죄에 매이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분노



예수님을 죽이려고 색안경을 낀 이들에게 그 말씀은 ‘성령과 예수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실리 없었을 터인데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붙들렸는데 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악한 귀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지만, 불의 앞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이들 앞에서는 단호하셨고, 목숨 걸고 그들과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도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을 믿는다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성령이 모독을 당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반듯하게 서십시오. 그래서 행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일에 동참하지 마십시오.

■ 순종이 피보다 진하다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하시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들이 내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덧붙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하십니다.

이 말씀을 종종 예수님이 혈연적인 가족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오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 외에 제자를 부르실 때에도 이런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가족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곧 예수 자신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 가족이라는 것이지, 가족의 소중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각각 다른 중요함입니다. 어느 한 쪽만 중요하거나, 어느 한 쪽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만 갇혀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가족들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야할 때가 있으며, 그 때는 가족이 아닌 이들의 반대보다 감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가족과 부모에 대해 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신앙 행위는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습니다. 이단은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가족도 다 버리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가정이 곧 작은 하나님 나라라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군중은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ho ocholos)이었습니다. 갈릴리의 민중은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과 대결 구조를 갖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이 대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갈릴리 민중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는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합니다. 가족들 역시도 그런 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신앙공동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은 참으로 중요한 단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족이기주의 팽배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가족의 개념보다는 ‘우리끼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런 가족이기주의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인종혈통주의, 성차별주의, 정치, 이념, 종교 등 각종 분열은 ‘우리끼리’라는 가족이기주의의 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성숙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의 기준을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혈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뜻에 일치를 이룬 사람들, 그들이 참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예수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들린 ‘영적인 사람’이셨고, 이에 따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부활 이전의 예수님, 즉 역사적인 예수님도 중요하고, 부활 이후의 예수님, 즉 신성화된 예수님도 중요합니다.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제가 사람 예수, 역사적인 예수, 부활 이전의 예수님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나눈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을 구분하지 못하여 인간 예수를 지워버리고 신적인 예수만 남겨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하셨지, 우린 못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 따라 살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부활 이전, 곧 사람이셨을 때 하신 모든 일들에도 ‘신적인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왜곡됩니다. 예수님을 왜곡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아니겠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에 붙들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셨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와 다르지 않는 사람이셨다는 것을.
다르다면, 온전히 성령에 붙들려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따라 산다.’ 혹은 ‘닮는다.’는 의미는 ‘신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붙들린 사람 예수님처럼, 성령에 붙들려 살아가길 원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임을.

[거둠 기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성령에 붙들려 사셨고, 성령에 순종하신 삶을 사셨던 주님, 우리도 성령에 붙들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과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한남교회를 새로운 가족공동체로 저희들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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