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1주 / 삼위일체주일(20240526)
To be, or not to be
로마서 8:12~17

오늘은 성령 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이며,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교회는 10세기 이래 성령강림주일에 이은 첫 주일은 삼위일체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삼위는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하시는 일에 따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위격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각자 따로따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으로 동시에 활동하신다는 고백으로부터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교리는 다신교 혹은 다신주의와는 구별됩니다. 교회는 니케아신조로부터 사도신조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런던에서 극작가로 명성을 떨쳤던 셰익스피어가 있습니다.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와 함께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알려졌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오늘날에도 가장 많이 연극 무대에 오르는 <햄릿>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면서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형태로 공연되고 있습니다. <햄릿>하면 떠오르는 명대사를 아실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연결된 문장을 조금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고상한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맞고 사는 것과
밀려드는 역경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다 죽는 것 중에.”
주인공의 고뇌가 압축된 문장입니다.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밀려드는 역경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이 더 고상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덜 고상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삶이 이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이 문장은 상징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죽었다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를 깊이 묵상하게 만듭니다.
13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햄릿>의 명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쉽게 풀면 “너희의 생각대로 살면 죽겠지만, 너희의 생각을 성령의 생각에 굴복시키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힘을 믿고 사는 데 익숙합니다. 이것은 유진 피터슨은 ‘옛 삶’이라고 합니다. 옛 삶은 우리에게 전혀 유익한 것이 없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옛 삶’을 땅에 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으로써 행실을 죽이는 것은 곧 나의 생각을 성령의 생각에 굴복시키는 것이고, 옛 삶을 땅에 묻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육신의 빚’, ‘몸의 행실’ 등은 우리를 죽이는 종살이의 영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우리를 두려움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구원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조마조마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의 경고도 있습니다만, 두려움은 노예 신앙의 상징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며 신앙생활을 강요하는 종교는 사이비종교입니다.
종살이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불안의 근본 원인이 되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거듭난 사람, 새사람, 성령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받은 영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참 자녀는, 설령 잘못한 일이 있어도 어버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굳센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라도 구원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도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불안 혹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져들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아람어 ‘아바 아버지(Abba ho patel)’의 번역입니다.
아버지보다는 ‘아빠’라고 해석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릴 적 아이들과 의자 같은 곳에 서 있다가 허공에 뒤로 눕게 하고, 제가 받아주는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냥 몸을 날립니다. 아빠가 반드시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던질 수 있는 신뢰의 관계를 나타나는 말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 어머니’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할 때에는 ‘아빠’를, 위로와 사랑이 필요할 때에는 ‘엄마’를 찾듯이 하나님을 아빠, 엄마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는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과 가부장적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도 남성으로만 인식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에 쓰인 동사 ‘부릅니다’는 ‘krazomen’입니다.
이 단어는 그냥 ‘부른다’는 뜻보다는 고통 가운데서 ‘외친다, 울부짖는다(we cry)’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 5장 거라사인의 지방 무덤가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큰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도 이 동사가 사용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소리를 지를 때(마 27:50) 이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짖음에는 ‘간절함’이 들어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묻는 삶입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조금 생뚱맞은 해석 같지만, 의미를 생각해보면 심오한 해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선하신 역사가 무엇인지 간절한 마음으로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저는 보았습니다.
여러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여러분, 아이들이 얼마나 궁금해 합니까? “다음은 뭐죠?” 그런 기대를 품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런 기대를 품은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면 온갖 세상의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물질적인 축복에 기반한 성공과 행복은 많은 사람의 삶의 목표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분법이나 이원론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신앙은 저급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육신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성자 예수님도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나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그런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나님의 자녀 살아갈 것이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이들의 물질관이나 성공관은 세상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불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여야하고, 공부해서 남 주냐가 아니라 공부해서 남 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느냐, 죽느냐’로 해석된 익숙한 문장이지만, ‘to be’는 ‘존재를 향하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치사 ‘to’는 ‘~를 향하여 가다’는 방향성을 의미하는 단어고, ‘be’는 존재, 근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향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육신, 몸의 행실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그 삶을 죽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고, 상속자가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상속 받는 것에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있습니다. 왜, 고난입니까?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 육신대로 살던 옛 삶을 죽이는 일은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상속에는 고난과 영광이 함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죽음 없는 부활은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에, 육신, 몸의 행실을 죽이고자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도우시어 제대로 사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내어주시고, 성령으로써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로지 육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면서, 우리의 영을 살리는 일에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성령의 계절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사는 것인지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