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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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5주]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함이

  • 관리자
  • 2024-04-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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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를 기억하고 함께 모인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봄이 시작된 느낌이 듭니다. 한 며칠은 봄이라고 하기엔 춥고, 또 한 며칠은 봄인데 너무 여름 같은 날씨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절기로 보면 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곡우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입하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저희 둘째의 어린이집을 데려다주는 길에도 꽃이 예쁘게 피어서 등원할 때마다 꽃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여러분도 길가에 핀 예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시죠? 더 좋은 건 우리는 아직 4계절이 있어 계절별로 피는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길을 걸으면 잠시 삶을 잊고 자연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짧은 순간 행복이 스쳐 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계절인 봄을 충분히 느끼고, 에너지로 충만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의 기준은 각자 다르다고 말하는데, 제가 보기엔 대부분 비슷한 듯 보입니다.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의 행동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를 넘어 시장사회의 형태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돈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열심히 일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이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이 많은 것과 달리 급여로 삶을 꾸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가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지난달에 미리 나의 급여를 담보로 카드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가 아닌 잔액에 만족해야 하지만, 우리는 다음 달의 급여를 담보삼아 또 카드를 씁니다. 이렇게 돈을 버는 과정은 매우 고되고 힘드나 돈을 쓰며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로 지나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온갖 매체에서 돈으로 이룰 수 있는 화려한 모습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실제 돈이 쓰이는 공간에서 주로 권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행복은 목표가 이뤄지는 짧은 순간이 아니라 목표로 향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내가 목표한 무언가를 이뤘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목표한 무언가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느껴야 할 감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만이 힘들고 고된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전 이 부분에서 공감했습니다. 한때 젊은 세대에게 파이어족이라는 게 유행인 적이 있었습니다.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을 이룬 뒤에 조기 은퇴를 통해 그 이후의 삶을 경제적 압박 없이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돈을 벌면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젊은 시절을 헌신하거나 희생해서 돈을 많이 벌고 집을 사는 대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편하게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저의 부모 세대는 돈을 벌면 집을 샀고 자식을 공부시켰습니다. 바로 지금보다 미래의 행복에 투자한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돈을 아무리 벌어도 집을 사는 게 너무 어렵고 변화가 잦고 그 폭도 빠른 세상이다 보니 이루기 힘든 목표 대신 이룰 수 있는 작은 목표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파이어족은 아니어도 큰 목표를 세우지 않고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에 집중하는 젊은 세대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 세대와 가치관이 매우 다릅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모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과 상처가 예고치 못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인 시편 22편을 보면, 불행이 찾아와 벼랑 끝에 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읽은 22편의 앞부분을 보면,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의 탄원으로 시작됩니다. 탄원하는 사람이 불행한 상황에 놓였다고 말씀드린 건 그의 몸이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처방받거나 치료를 받지만,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적절한 의료서비스도 없었을뿐더러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며 주위 사람에게 모욕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심지어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경제 활동도 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호의나 자선으로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욥기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욥기 3장을 보면, 고통을 견디지 못한 욥이 자기의 처지를 저주하며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자녀와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욥은 사회로부터 밀려나 쓰레기 더미에서 살고 질그릇을 깨 그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으며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욥이 더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었던 건 사랑하는 아내의 저주와 친구들의 조롱과 비아냥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고, 그의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을 거라며 회개하라고 권했습니다. 어쩌면 질그릇으로 몸을 긁고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야 했더라도 아내와 친구들이 욥의 편이 돼 주었다면 그의 고통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랜 논쟁에도 끈질기게 욥의 회개를 요구했고 끝까지 욥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시편 22편의 주인공 역시 사람도 아닌 벌레 취급을 받고 비방과 모욕에 시달렸습니다. 조롱과 빈정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협하러 주변으로 황소 떼가 달려들고 물소 떼가 뿔을 낮추며 콧김을 내뿜는다고 말합니다. 들개 무리가 달려들고 폭력배들이 떼 지어 공격한다고도 말합니다. 탄원하는 이 사람은 아무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을 살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그는 한 줄기 희망에 의지하는데 그건 선조들을 구원해 낸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의 얼굴을 찾았고, 그가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의 고난에 아무 말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외쳐도, 나를 버리는 거냐며 화를 내도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 마가복음 27장과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 위에서 터져 나온 예수님의 절규입니다. 22편의 주인공은 예수님 못지않은 고통 속에 놓여있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쳐도 아무런 답이 없는 하나님에게 울부짖었던 겁니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 절망의 끝자락에 위험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절규에도 아무 말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늘 측은히 여기셨고,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치료라고 하지 않고 치유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행동이 단순히 병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사회적 차별과 멸시로 인한 상처도 어루만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자들이 공동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거나 쫓겨났는데,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이를 사회적 고립, ‘사형선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는 이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켰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회 안에서 경제활동도 했음을 뜻합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공동체로 다시 복귀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병의 나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온 불행과 상처를 대응하는 길은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하게 고백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고백하는 것은 비단 기도로만 이뤄지는 일은 아닙니다. 내 주변에 아픔을 고백하고 주변으로부터 힘과 기운을 얻는 것입니다. 선하고 건강한 공동체라면 아픔을 함께 나누려고 할 것이고, 다시 일어서도록 힘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뜻밖에, 아무도 모르게 기적을 행하기도 하시지만, 사람을 들어 쓰시기에 우리 주변에 여러 사람을 통해 그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22편 후반부를 보면 주인공은 병이 다 나은 듯 보입니다.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모든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 밝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일입니까. 그를 괴롭히던 병이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자기를 더 괴롭히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던 비방과 멸시 역시 사라졌습니다. 다시 공동체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을까요. 이 일은 비단 병이 나은 사람도 그랬겠지만, 그의 곁에 있던 가족과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믿음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마음은 더 넓어졌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병이 낫는 일은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일로, 신비하다고 표현됩니다. 치료법이 명확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 멀쩡한 사람이 아프거나 아팠던 사람이 다시 멀쩡해지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22편의 주인공은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교회 회중들 앞에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비한 기적을 일으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가 이전에 약속했던 희생제물을 바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이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약속을 지킴으로써 혜택을 입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주인공은 물리적 병에서 벗어난 뒤에야, 공동체로부터 다시 복귀한 뒤에야 비로소 공동체 내에 자기보다 어렵고 힘든 존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이들을 보살피고 챙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손톱 끝을 조금만 다쳐도 온 신경이 그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회나 작은 공동체의 중심은 그들이 외면하고 관심두지 않는 곳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공동체는 이렇게 그들의 관심을 아픈 곳과 취약한 곳에 둠으로써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기쁨과 감사로 넘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시편 22편의 주인공은 실제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사는 진짜였던 겁니다.

 

우리도 매주 병으로 고생하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병과 싸우는 일도 매우 힘들지만,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언제 통증이 사라질지, 병이 나을 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는 병을 가졌다 해서 비난하고 조롱하지 않지만, 완쾌되거나 통증이 사라지는 때를 알면 어떻게든 참고 버틸 텐데 이를 알 수 없으니 환자의 힘듦은 가중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고립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사회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이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힘듦과 처지를 쉽게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중보는 힘을 발휘합니다. 중보는 교우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낭떠러지 앞에서 내 손을 잡으라고 손을 내밀어 주고, 낭떠러지에서 그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교우들, 특히 병중에 있는 교우들을 향한 중보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와의 더 깊은 관계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병중에 있는 교우가 이런 체험을 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 체험은 중보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병중에 있는 교우의 간절한 기도와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관심 두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그저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생각하고 아껴서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과 기도가 모여 병이 치유되고 새 힘을 얻게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시편 22편의 주인공처럼 기쁨과 감사로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원래 정기적으로 드리던 고대 이스라엘의 탄원과 불평의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절규라고 알고 있던 그 고백은 그 때보다 예배를 통해 먼저 드려졌습니다. 이 기도가 예배에서 드려졌다면, 이에 공감하고 함께 울었던 이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건 환자의 병이 나았거나 병이 나아 공동체로 복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시편 22편의 주인공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 질병으로 인한 차별과 질시는 여전했고,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궁핍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낭떠러지 앞에 놓인 풍전등화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게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이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듭니다. 당시 공동체로의 복귀를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악귀를 통한 불의한 일로 규정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낫게 하셨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은 오히려 병이 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에 격분한 병이 나은 이가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우리를 가르치려 하냐며 그를 바깥으로 쫓아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주려 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을 찬양으로 표현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말씀을 통해 그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시작될 일상에 참여할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기쁘고 감사하다면,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가 이야기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약속을 실천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이들에게 힘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이웃과 사회에서 선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을 느꼈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예배는 그저 반복하는 일상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감사함을 교회에서 나눈다면 고통 중에 놓인 교우를 위한 중보를 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누군가를 위해 두손 모아 기도하고 중보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공동체는 끈끈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함을 교회 밖에서 나눈다면 가난한 이들과 고통에 빠진 이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사람들이 베푼다고 여기지만, 정작 그 희생과 봉사를 오래한 분들은 오히려 자기가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곳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시편 22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고난 받았던 사람과 만났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예배와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만나야 하는지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끼는 사람을 들어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며 기도할수록, 우리의 삶이 그 기도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삶의 순간에서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쁨으로 여기고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 속에서는 즐거움과 사랑을 느낄 것이고 불행 속에서도 위로와 자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얻게 될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 어디서든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품고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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