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의 위기로 봄이지만 여름 같은 날씨를 보내고 있는, 뉴스에서 또 역대 최고로 덥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우리이지만,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달력은 4월인데, 벌써 5월 말이나 6월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요즘입니다. 시험을 망친 채 성적표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마음이 초조합니다. 미국 시카고에서는 때아닌 한파가 몰아쳐 체감온도가 영하 60도라는 이야기가 들리고 강물이 얼어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돌아다녔습니다. 또, 두바이에서는 2년에 내릴 비가 하루에 다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내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심하고 있다면 우리는 솥 안의 개구리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말은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금 교육관으로 내려간 그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세상을 상상하면 쉽습니다. 봄과 가을이 확연히 짧아져 마치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더위가 훨씬 길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폭우와 가뭄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집니다. 공기의 질도 나빠져 코로나 때처럼 마스크를 항상 껴야 합니다. 때아닌 폭염과 혹한이 반복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도 사람 자체는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과 식물은 그렇지 못합니다. 농사와 목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생활이 흔들릴 것입니다. 삶을 힘들게 하는 물가는 지금보다 더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잘못은 어른들이 다 해놓고 그 피해는 아이들이 져야 하는 세상은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 꽤 불공평해 보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아이들은 커서 부모와 조부모 세대를 탓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그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들은 자주, 많이 일어납니다. 세상 자체가 불의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센 나라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합니다. 가난한 나라는 강대국이 그들의 자원을 약탈해 가도 제지하지 못합니다. 적도 부근의 작은 나라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높아져 나라의 존폐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나라 밖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이런 일은 많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불의한 요구를 강요하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비장애인이면 누구나 갖는 권리를 빼앗깁니다. 기업이 힘들어졌는데, 구성원 모두가 아닌 가장 힘없는 사람들만 고통을 겪고, 나라가 힘들어졌는데, 정치인이나 고위급 공무원 같은 사회 지도층이 아닌 서민들만 힘들게 삽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최근 몇 년 새 가난한 사람들의 빚은 더 늘어났고, 그새 부자들은 빚을 다 갚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에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많다고 주장해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불공평과 불의를 만납니다. 상황이 이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시스템에 순응한 채 삽니다. 이미 사회에 적응되어 불평과 불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힘센 사람이건 약한 사람이건, 돈이 많은 사람이건 적은 사람이건 불공평과 불의에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은 외칩니다. 불공평하다, 불의하다고 외칩니다.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세상은 누군가 외친다고 바뀔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정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늘 피해받고 고통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도 어른들은 ‘괜히 나서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 나대지 마라’라든가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라는 충고를 늘 했습니다. 그러는 새 사회는 점점 더 썩어가고 악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만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던 때도 그랬고, 오늘 본문의 배경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사도가 되어 의회에 끌려온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엔 베드로가 사도가 되어 예수님이 그러셨듯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 다르게 보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전의 그 베드로가 맞나 싶은 정도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소개합니다.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역시 그의 올곧은 성품과 행실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드러내는 가장 큰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에 가셨습니다. 도시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가이사랴는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를 가리키는, 그래서 로마의 황제에게 바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로마가 모시는 신을 모신 신전이 많았습니다. 이 도시와 신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유대인이라면 위축되는 게 당연할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로마의 신전 앞에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시 베드로라며 그의 믿음을 칭찬할 만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그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크게 혼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사탄에게서 비롯됐다고 하시며, 베드로가 나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합니다.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신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모를 수 있었던 걸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은 그를 압도하지는 않지만, 그를 두려움에 떨거나 움츠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가 끌려온 곳은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님이 재판을 받은 곳이었을뿐더러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겁에 질리거나 너무 초조했을 정도고, 그래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 그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제자와 추종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이들은 ‘산헤드린’ 의원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아람어로 ‘함께 둘러앉는다’라는 뜻으로 유대의 지배층 중 70인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의 입법, 사법기구였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을 독점하고 있던 사두개인, 대중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은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권력을 위임받았기에 사형시킬 권한은 없었지만, 그 외의 모든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 중에서도 사두개인은 대제사장 사독의 후손들로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사제라고는 하나 유대교를 지키거나 율법을 잘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정도로 타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의 지지를 받자, 그들의 권력을 빼앗을 것을 우려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모함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쳤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그 가짜 뉴스가 복음서가 쓰일 때까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돌아다녔다고 하니 그들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암튼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예수님에게 던진, 똑같은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졌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그런데 어디선가 이 말을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누가복음 20장을 보면,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예전에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로 그들의 영향력이 약해질까 골치를 썩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죄를 씻는 일은 오직 성전에서 속죄 제사로 가능한데,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니 성전의 영향력이 약해질 게 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례요한처럼 은둔자처럼 지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이들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모세오경만 믿고 따르며, 권력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도 핍박하는 이들은 오직 자기 자신들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에게 되묻습니다. 그들의 골치를 썩였던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묻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다 혹은 사람에서 온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면박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또 베드로에게 똑같이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베드로는 너무도 차분하고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고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어떻게 이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요?
예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던 이유와 지금 그가 산헤드린 의회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지향에 있습니다. 그가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로마의 신전 앞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진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유대인처럼 예수님이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처럼 유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그 나라의 왕이 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강했던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고 수많은 강대국에 지배받은 지 최소 6, 700년이 지났으니,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하나님이 이뤄주실 나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안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거대한들 어차피 다 무너지고 말 것이며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기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뚜렷하고 확실한 미래가 있을 때, 사람이 얼마나 확고해지는지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오르면 분명 베드로 자신도 중요한 자리를 얻을 거라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는 미래가 확실해 보이듯, 그의 자리 또한 확실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의 욕망이 자리 잡았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만들 하나님 나라보다 자기가 군림하게 될 자리가 더 커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힘들고 억눌렸던 삶이 이제 좀 펴지고 내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세상이 되나보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크게 혼났듯이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돌아가시자 그의 꿈과 욕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던 그의 위치가 하루아침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는 상관없이 베드로의 욕망으로 세워진 나라가, 자기가 서야 할 위치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뤄질 것 같았던, 손에 잡힐 것 같았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허무함과 자기가 온몸을 다해 섬겼던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죄책감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 줄 알았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베드로가 꿈꿔왔던 삶의 지향을 옮겨 놓았습니다.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욕망 대신 베드로의 마음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꿈꿨던 나라는 이미 베드로의 머리나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그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하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가르치셨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여겼던 병자들을 고치며 로마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던 세리나 더러운 피가 섞인 민족이라며 혐오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던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베드로의 마음이 예수님처럼 따뜻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성경은 이를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표현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두려울 게 없어졌습니다. 사두개인들의 협박과 위협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향해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주장할 담대한 기백이 생겼습니다. 이미 그의 스승인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고 이를 생생하게 목격한 베드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칩니다. ‘착한 사람이 돼라.’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라.’ ‘빨간 불엔 건너지 말고 초록 불에 건너야 한다.’ 이런 말은 어른이라면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아이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줄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 가면서 가르침이 바뀝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시험 잘 봐라.’ ‘좋은 대학에 가야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왜 이렇게 바뀌는 걸까요? 공부는 자기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시험에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일 뿐이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해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한 길일 뿐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그보다 더 커서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면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가르침을 ‘처세’ 혹은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이야기보다 우선하는 것이 기독교인에 온당할까요? 오히려 ‘착하게 살아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라.’라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과 더 가깝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르셔서, 우리가 그의 삶을 따라 할 수조차 없는 경지이기에 우리가 그의 삶을 따르지 못하는 거라면 그의 이름으로 삶이 바뀐 베드로는 어떠십니까. 그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매번 꾸중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보다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시니까 그런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죽음의 위협과 협박 앞에서 굴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난 돌 중에서도 모난 돌이 되었고, 예수님의 자리를 머릿돌이 아닌 석공들이 버린 돌로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과 행동으로 그는 예수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삶도 예수님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예수님이라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삶이라는 핑계는 제쳐두고 이제 베드로의 말과 행동을 보십시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변한 그의 삶 역시 다마스쿠스 길 위에서 환상 체험을 하고 삶이 변한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뀔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살길 바라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 삶은 예수님의 삶과 점점 멀어지고 악이 만연한 세상과 점점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베드로의 삶을 생각하며 우리 삶의 변화를 꾀해보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두손 모아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