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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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3주] 우리를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 관리자
  • 2024-04-1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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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두 번째 주일, 부활절 셋째 주일을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영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세상에 우리 어린이부 친구들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또 있을까요?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을 보면, 눈이 하트 모양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귀여움에, 순수함에,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니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하기도 하지만 순진하기도 합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말 대신 진심을 담아 말합니다. 때론 그런 아이들의 말이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설령 아이가 어떤 경우에 거짓말하더라도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진심을 발견한 어른은 아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어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혼내거나 다그치기 일쑤입니다. 어린이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범위가 작아서 특별히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조금 다릅니다. 관계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많은 사람과 만나는 어른들은 거짓말도 잘하고 그 거짓말이 들통 나더라도 오히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변명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대개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의 선동이나 상인들의 선전, 언론인들의 기사라고 할지라도 자기만의 눈으로 판단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말의 신뢰도가 참 낮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을 주려고, 또는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살핀 후에 파고들기도 하고, 때론 약점을 파악해 설득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설득하려면, 사람에게서 신뢰를 얻으려면 말이 아니라 그럴 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이 아닌 참을, 한 순간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렇게 살아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 대신에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 화려한 영상을 만들거나 주변 사람을 포섭해 상대를 흔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려하고 뛰어난 영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의 욕구나 욕망을 파악해 그에 맞는 이야기로 꼬드겨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믿어주세요.’라고 계속 말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눈을 현혹시키거나 말로 상대를 속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사는 모습을 한결같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선교일 것입니다.

 

호연지기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요한1서입니다. 당시 요한 공동체에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과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거나 접한 뒤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출신에 따라 성향도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할례를 중요하게 여겼고 무엇보다 음식 예법을 잘 지키고자 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유대교를 접하게 되었지만, 그리스 철학을 토대로 예수님의 활동을 해석했습니다. 공동체가 처음 시작했을 때, 이들은 사이좋게 잘 지냈지만 시간이 흐르며 갈등과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요한1서의 기자는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며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며 지금 2024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읽으면 성경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꼭 고려해야 합니다.

 

참 아까 어린이부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했듯이 예전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절과 2절에 나오는 아버지와 자녀라는 표현이 당시 얼마나 획기적인 표현인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 속에서 무섭게 벌주고 혼내는 이미지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온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그의 백성을 보살피는 이미지의 하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규정되어 온 하나님의 모습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여 예수님의 삶을 해석하려고 했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신 게 아니라 영으로 잠시 머물다 가신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고, 사람의 눈에만 가짜로 보였던 거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사람을 영과 육으로 나누어 육체가 하는 행동은 하찮게 여겼고, 육체가 저지른 범죄는 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어서 죄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육이 아닌 영적인 존재가 되길 원했고, 깨달음을 얻어 영적인 존재가 되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의 기자는 3절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한 뒤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그처럼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깨끗하신 것 같이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전 여기서 구약성경 레위기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레위기 19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다쉬는 매우 고귀하여 신성시되는 어떤 영역과 구별되고 분리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의 말씀처럼 가나안에 정착한 히브리들은 거룩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거룩한 존재라고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주변 나라가 왕을 세우고 나라의 힘을 키우며 그들을 위협했을 때도 왕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땅을 사고 팔며 누구는 돈을 벌고, 누구는 재산을 잃었지만, 히브리들은 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팔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도 만들어 땅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땅 자체를 본인의 소유로 여기지 않았고, 땅에서 난 곡식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여겼습니다. , 이들은 왕 대신 하나님이 보낸 사사가 필요할 때마다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탈출한 히브리들로 하나님이 만들어 갈 나라는 이집트처럼 왕이나 황제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백성으로 여기고 다스리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와는 다르게 운영되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지 않고 대신 삶의 여러 실천을 통해 왕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법과 정의를 따르며 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우리 수요성경공부 교재인 구약 종주를 쓴 안소근 수녀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합리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이들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의 시대가 지나가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구별됨분리라는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어 예수님 시대에는 그 의미가 권력가들의 권력 획득을 위한 무기로 쓰이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고 정죄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표현의 바리새분리하다라는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라는 표현이 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불렀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경건한 자라고 불렀고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성경 구절을 넣어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경문 곽을 일부러 크게 만들어 찼으며, 옷술에 율법 문구를 넣어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길을 다니면서도 나는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대놓고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율법도 잘 지키며 그 뜻을 잘 해석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좋아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위선적으로 행동했고, 내게 적용하는 기준과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분명하게 달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적 의미로 바리새인이라 불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들을 무덤에 회칠한 자, 독사의 새끼라는 분노와 경멸을 담아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1서의 기자는 3절을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일까요?

 

주님에게 소망을 둔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유대 출신의 기독교인과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이 모인 요한 공동체는 갈등과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유대 출신의 기독교인과 예수님이 영적 존재여서 보이지 않았다는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가 다시 나타나면 우리도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진리를 터득하는 순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에 요한1서의 기자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그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죄를 지어도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터무니없는 가르침을 부정하고 죄를 짓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일갈합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떠들거나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죄가 없는 영적 존재라고 하는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짓지 않은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 안에 머무르며 그처럼 사는 것만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록된 오늘의 본문을 살피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교회는 오래전부터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켜 왔습니다. 교회와 세상, 선과 악, 믿음과 불신, 참과 거짓 등 많은 이분법적 용어로 교회에는 하나님의 선한 모든 것이 있지만, 교회 밖 세상엔 악한 것이 득실거리는, 위험하고 불의한 곳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살면서 느끼기에 실제로 그러하던가요? 교회 밖 세상엔 악함만 있고, 교회 안에는 선함만 있던가요? 아니었습니다. 교회 밖 세상에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도 거짓과 불신, 더 나아가 범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에만 선함이 있는 것처럼, 교회 밖 세상에는 악함만 있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말의 힘이 약해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나 교회의 선함만 강조하며 예배에 나와 믿음을 얻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점점 고립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면, 요한13장의 말씀에서 그분이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도 깨끗해야 하는 것 같이 레위기 19장의 말씀에서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말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선하다, 교회만 거룩하다는 말은 이제 허공에 외치는 외마디 구호일 뿐입니다. 내가, 교회가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합니다.

 

추락하는 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법은 그뿐입니다. 우리는 과정을 살아낼 뿐, 결과는 오직 하나님이 아십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다라고 요한1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 모두 생을 마치는 날, 아니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그때의 결과를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사랑을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을 건네고, 양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나에게 손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이런 기독교인의 다름불의와 부정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는 다름, 이기적 탐욕 속에서도 남을 돕는 봉사의 다름, 실망과 낙심 속에서도 희망에 밝은 다름, 죽음의 선도 노래하며 넘는 다름 등 숭고한 도덕적, 영적 다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멈추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31절에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2024년인 지금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남 탓, 세상 탓, 시대 탓을 합니다. 계속 세상과 담을 쌓고 분리되길 원합니다. 세상은 이미 우리에게서 눈을 돌렸습니다. 예전보다 더한 악으로 치닫고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창조질서마저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앞에 서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게 여전히 그들만의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악함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자라지만 오늘의 말씀을 잘 채워서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여러 출신 지역과 성향에 따른 사람들의 갈등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한1서 기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죄를 짓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감사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그 사랑을 나누며,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천이 없이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만 하거나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벽을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게 만들거나 욕보이는 일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실천하는 것은 교회 밖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선교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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