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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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2주] 평화가 있기를

  • 관리자
  • 2024-04-0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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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첫 주일, 부활절 둘째주일을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영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이나 친구를 만나면 안녕혹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이렇게 인사는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와 함께 그 사람의 안부를 자연스럽게 묻게 합니다. 상대가 나처럼 안녕하세요.’라고 받으면 그도 나처럼 안녕하구나.’라고 여기게 되지만, 반응이 없거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 마음이 심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타이완의 동부 화롄 지방에서 강도 7.2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벌써 사망자와 부상자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친한 친구들이 타이완에 있어서 몹시 걱정했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인명 피해가 크지 않기를, 무너진 건물도 잘 복구되기를, 무엇보다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가 함께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만약 지금 이들을 만난다면, 차마 안녕하냐는 인사를 건네지 못할 것입니다.

 

반가운 인사를 건네지 못할 만큼 큰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섣불리 인사를 건넬 수 없는 것은 비단 현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로 번역된 평화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인사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진 인사말이라는 것을 아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상황에서 이들은 쉽게 샬롬이라는 인사를 건넬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유대 사람, 특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나 그의 추종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거나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로마의 날카로운 칼날이 언제 그들을 겨눌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는 모두가 다 아시는 대로 로마의 정치범을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언덕에서 그는 저항 한번 없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이들을 용서하시며 목숨을 다하셨습니다. 로마가 정치범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저항이나 반란을 일으켰다가는 이렇게 된다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와 협박이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누구라도 입을 꾹 다물고 굳은 얼굴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로마의 평화인 팍스 로마나의 팍스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평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황제나 지배자들 앞에 무릎 꿇고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굴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그들에게 복종하는 이들에게는 혜택을 베풀었지만, 그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가는 그야말로 잔혹한 학살로 되갚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이제 로마의 눈을 피하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거나 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샬롬이라는 인사가 가능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였습니다. 마태복음 1012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직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조차 믿기 힘든 상황에서 실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도 어안이 벙벙했을 수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도, 직접 달려가 그 빈 무덤을 확인했을 때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뵈었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도 이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들에게 나타나셨고, 못에 찔렸던 두 손과 창으로 찢긴 옆구리를 보여주신 이후에 이들은 비로소 믿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때 자리에 없던 도마가 나중에 이야기만 듣고 믿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믿게 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과연 제자들과 도마의 믿음이 큰 차이가 있었나 싶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별 차이가 없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을 보냈고, 지난 한 주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주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금식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절제하며 이 기간만큼은 예수님의 고난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부활주일이 되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기뻐서 그런지 그간 참고 견뎠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우리도 고난에서 해방됩니다. 마치 다이어트를 하거나 멋진 내 몸을 사진으로 남기는 바디프로필처럼 노력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이 기간이 끝나면 그동안 못 먹었던 것들을 우걱우걱 먹는 사람들 같이 우리의 욕구는 멈출 줄 모르고 분출되는 것 같습니다. 고난주간과 사순절 기간만 예수님의 고난을 느끼고 체험하면 된다고 오해할 정도입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우리는 고난주간과 사순절 기간에만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보고 다른 모든 날은 기쁨으로 넘치면 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나와 같은, 예수님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전 여겨졌습니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전에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아주 잘 보았습니다. 그는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한 위대한 여러 일들보다 그 일의 끝을, 마지막을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예수님처럼 살다가는 예수님처럼 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면 너무도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나신 건 너무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제 다시 살아나셨으니, 예수님이 직접 하시고 우린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사명을 그들에게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비단 이 당시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이때 살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저 사명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로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떠오르는 구약성경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이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따랐다가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자,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고 흩어져 문을 모두 닫았습니다. 예수님만 죽었던 게 아니라 이들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악이 판치고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이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마치 흙으로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숨으로 생명체가 되었던 것처럼,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숨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과는 다른,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깨닫고 다시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휘황찬란한 로마 문화의 유혹과 거짓과 굴종으로 가려진 가짜 평화의 협박에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끝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로마로부터 처벌받을 두려움에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온갖 유혹과 협박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한번 제자들의 마음을 잡아줍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거나 거듭난 존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그들을 위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섬기는 왕으로부터 큰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자기가 꾸어준 빚을 가혹하게 받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왕에게 다시 그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갇혀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거듭난 제자들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빚과 죄는 다른 거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라는 부분에 등장하는 로 번역된 그리스어 오페일레마타는 다른 죄를 뜻하는 그리스어 하마르티아와는 달리 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를 하나님께 빚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이야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 성경에서 23절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가?’ 당시 지배층은 사람들을 정죄하며 그들을 옭아매는 도구로 이용하고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았던 이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죄책감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로마에 대항하고,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같은 귀족 사제들과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나라는 로마나 그들을 다스렸던 어떤 강대국처럼 눈에 보이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사람이 머무르는 곳, 하나님의 주권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이제 우리가 고백하는 부활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사순절과 고난주간만 잘 보내면 되는 될까요? 우리가 부활을 고백할 때, 그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귀에 들리는, 눈에 보이는 설교와 말씀만으로 이해하는 건 온전하지 못합니다. 매년 생일이 돌아오는 것처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그런 의미여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그렇게 가볍고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고백하는 건 기독교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절망에 빠지고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다음,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죄나 책임을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그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숨을 불어 넣으시고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해 주면 그 죄는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새 생명을 얻고 거듭난 제자들이 받아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못지않게 악이 판치고 선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선의로 행하는 것을 보기 힘들고 뉴스에 나오는 선행이 전부인 줄 아는 우리의 삶은 제자들의 삶 못지않게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고 우리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지금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곳에서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평화를 전하려면 이웃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돕고, 내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야 합니다. 내게 일어날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평화를 전할 수 없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사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전한 사명이자 부활을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기쁩니다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마음의 위대한 고백이 바람에 사라지는 허무한 외침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의 삶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가볍고, 매년 돌아와 별 감흥도 없는 그런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어쩌면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큰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고, 그들이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했습니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크리스티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기독교인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정의한다면, 그렇게 여긴다면 우리의 삶은 이제 이전과는 달리 조금 명확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품고, 그가 살았던 모습을 기억하며 그대로 살아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부활의 의미를 기억하고,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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