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5주(2021032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5~11
여러분 갈대와 억새를 구분할 줄 아시는지요?
억새는 키가 작고 언덕이나 들판에서 볼 수 있고, 꽃이 피면 은빛 물결을 이뤄 감탄을 자아내는 식물이지만, 갈대는 습지에서 피어나고 키는 2미터가 족히 넘지만, 꽃이며 줄기며 갈색이고 바람에 흔들리며 꺾어지고 상하기를 잘해서 조금은 볼썽사나운 식물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제주도에 살적에 제주도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성산포에서 동남으로 가는 해안도로 습지에는 갈대밭이 있습니다. 가을까지 무성했던 갈대밭은 겨울을 보내고 나면 훤해집니다. 봄에 가보면 연록의 새순이 날카로운 창끝처럼 솟아오르는데, 며칠 지나고 나면 이내 푸릇푸릇한 갈대밭이 됩니다. 겨울을 보내면서 그 많던 갈색 갈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여름이 되면 갈대밭이 빈 틈 없이 꽉 차는 것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갈대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목신인 판의 구애를 피해 달아나다 갈대가 되었다는 님프 이야기’, 베르디의 오페라 ‘Regoletto’에서 파파로티가 부른 노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하는 노랫말, 그리고 파스칼의 명언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가 생각나고, 유명한 팬풀룻 연주자 게오르그 잠피르, 팬플룻 연주로 유명한 외로운 양치기, 엘콘도파샤 같은 노래가 생각납니다. 저도 팬플룻을 배워보려고 팬플룻까지 사서 연습을 하다가 음계만 익히고 포기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인생은 갈대>라는 글에서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을 소개하면서 ‘갈대’를 통한 묵상을 나눕니다. 갈대를 닮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생각하는 힘 때문에 연약하지 않은 데가 있다. ‘갈 때’, 인간을 갈 때가 있는데, 인간에게는 갈 때를 생각하는 힘이 있으며, ‘갈 데’, 인간은 갈 데, 곧 목적이 있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대가 센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가 센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꼿꼿하게 서는 것, 버티는 것, 올바른 것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봄에 날카로운 창끝처럼 기운차게 솟아나던 연한 순도 겨울이 되면, 말라버리고, 꽃도 잎도 떨어지고, 속이 텅 비게 되는데, 속이 텅 빈 갈대만이 꺾어 피리를 불고자 하면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갈 때를 알고, 갈 데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시다가 텅 빈 갈대줄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것이라는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말라버리고, 꽃도, 잎도 떨어지고 속이 텅 빈 그분의 삶을 통해서 맑은 소리를 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예수님이 직접 외치시는 시대가 아니라, 구약시대 예언자들을 불러 대언하신 하나님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불러 외치게 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대로 만든 악기, 팬플룻이 있습니다.
소리는 쉽게 낼 수 있지만, 누구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맑은 소리를 내려면 수없이 많은 연습을 해야겠지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빽빽’ 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도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서만이 제대로 예수님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익은 신앙인들은, 온전히 예수님이 품은 온전한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각 분야의 고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는지요?
아는 것이 경지에 이르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아주 작은 결함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이라고 하지요. 이런 노력 없이 뭔가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고수 역시도 거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각고의 고통’을 겪으셨는데 우리는 너무 편안한 신앙생활만 구하다보니 ‘갈 때’도 모르고 ‘갈 데’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키워서 ‘갈 때’를 알고 ‘갈 데’를 아는 위대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발현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다면, 바로 이것,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연주’란,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본받아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면 그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게 되셨고(7),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8)하신 것입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비움’이요, 죽기까지 복종하신 결과는 ‘십자가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비움과 고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꼿꼿하던 갈대도 늦가을에는 구부러져 누런 줄기가 물에 닿습니다. 겨울이 오면 이내 말라버리고, 꽃과 잎은 떨어지고 속은 텅 비게 됩니다. 갈대는 이렇게 텅 빈 줄기가 되어 비로소 소리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갈대가 구부러져 누런 줄기가 물에 닿은 사건이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온전히 자신을 비웠으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연주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중에서 ‘비움’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채움을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을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욕심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더 많은 것으로 채우려하고, 채우려는 마음이 클수록 빈곤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비움의 영성을 배우려면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직역을 하면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꾸준히 생각하라”입니다. (헬)‘프로네이 테’- ‘너희 스스로 이것을 생각하라.’입니다. 이것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결정을 하실 때마다 자신을 비우셨습니다(7). ‘비움’의 헬라어는 ‘케노시스’인데 ‘스스로 자신을 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비움의 영성은 우리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결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개인의 결단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자신이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은 자신이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을 꾸준히 생각하시고, 묵상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 생각을 깊이 하면을 비우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채우고자 하는 것을 예수님도 채우시고자 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열심히 채우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러나 아니라면, 그냥 놓아버리십시오. 포기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이것이 비움의 영성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중에서 ‘순종’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과 사람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고의 존재자이신 하나님께서 완전한 굴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자발적 순종’이라는 점입니다. 십자가는 사도 바울 당시 기장 수치스러운 사형 방식이었고,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런 죽음에 대해서는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치욕의 절정이요,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생의 삶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속죄의 화목제물로 지불해야할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절망적이고 깊은 것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십자가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십니다.

하나님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자발적 순종이어야 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벌 받지 않으려고, 혹은 복 받으려고, 이런 상벌에 근거한 신앙은 어린 아이의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발적 순종’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순종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결론이 났더라면, 그냥 위대한 성인 한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서 살다가 죽은 사건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실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은 끝이 아니라 영광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사람, 내가 순종함으로 뭔가를 채우겠다는 마음마저도 비운 사람,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우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름다운 음악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연주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갈 때’를 알고, ‘갈 데’를 아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갈대같이 연약한 존재지만, 위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비우시고 순종하셔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주님, 비우시고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못난 자아는 채우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살아갑니다. 채우기만 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주님, 회개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