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6주(202402011/변모주일)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 26~34

■ 두이레 강아지만큼

지난주에는 구상 시인의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라는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었습니다.
‘두이레 강아지만큼/신령에 눈뜬다....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이레는 ‘7일’입니다. 그러니 ‘두이레 강아지’는 태어난 지 14일 정도 되어 눈을 막 뜨기 시작한 강아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막 눈을 뜬 강아지에게 보이는 세상은 첫째로, 온전히 보이지 않고 흐릿할 것입니다. 그러니 두이레 강아지만큼 신령에 눈을 떴다는 것은 ‘신령’즉, ‘성령’을 보는 눈이 조금 뜨였다는 뜻입니다. 눈을 뜨고 희미하게나마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이제 막 눈을 뜬 강아지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세상은 신기하고 신비스러울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러운 것처럼, 신령의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고백입니다. 두이레 강아지만큼 눈을 뜬 시인은 자신의 삶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으로 바뀌었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무능과 무력도 감사하고, 하늘의 새와 꽃뿐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께서도 신령의 눈을 뜨셔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령에 눈뜬다’는 표현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문장으로 바꾸면 ‘영안이 열린다’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안이 열리면’ 점쟁이처럼 미래 일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기독교에서의 영안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령’ 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성령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였다’는 뜻입니다.
구상 시인은 1919년생인데 이 시를 발표한 시기는 2001년입니다. 그러니 82세, 거의 인생 말년이 되어서야 겨우 신령의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 뜬 것이 아니라 두이레 강아지만큼 밖에는 뜨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 시를 발표하고 3년 뒤에 돌아가셨으니 어쩌면, 신령에 눈을 뜨는 것, 영안이 열리는 일은 오랜 인내와 훈련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안이 열리는 일’은 반드시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시간의 의미인 크로노스가 있고,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라는 시간개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면 어떤 나이라도 신령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눈을 뜨면 삶이 달라집니다. 사실, 여러분은 모두 신령에 눈을 떴기에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바라보고, 들의 백합이 어떻게 피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들로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선생으로 삼으라는 이야기죠. 사람들은 간혹 새처럼 되고 싶다거나 들의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것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꽃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경우라도 침묵합니다. 자연은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새는 고통의 상황에서도 침묵하고 기다립니다. 백합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냥 침묵하고 기다립니다. ‘봄이 언제 올까요? 가뭄이 언제 끝날까요?’ 묻지 않습니다. 잘리워 아궁이에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때에도 침묵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더 크게 하는 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지도 않고 그저 침묵하며 그 자리가 좋든 나쁘든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지난 주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침묵을 배우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항변하다 깊은 깨달음을 얻고 ‘침묵’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듯이, 침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고 백합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침묵을 배우라!’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혀를 제어하여 꼭 필요한 말을 하고, 고통의 때에라도 말로 그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는 것이 침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염려를 하는 이들을 믿음이 적다고 하시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31)”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알고(32) 계십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단순히 ‘유대인’이 아닌 이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것입니다. 정신을 빼앗기고 나니 겉으로 드러나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런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아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 어떤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지, 옷장에 있는 옷이 유행에 맞는지 같은 것으로 안달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싼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값비싼 옷이나 유행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면 안 됩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삶으로 들어가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며,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신령한 눈을 뜨는 것’이요,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마음의 눈을 뜨면’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 우리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던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시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유익한 점은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걱정이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내일의 일로 동요하는 것입니다.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없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뜨면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범사에 침묵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상 시인이 두이레 강아지만큼 신령한 눈을 뜬 후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뿐 아니라 나도 공으로 먹이시고, 입혀주시니 그냥 감사도 아니고 ‘눈물로써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니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걱정에 빠져들지 말고, 눈물로써 감사하는 삶으로 들어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들어가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도 새롭고,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도 한없는 감동과 감격을 자아내는 법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일’은 물리적인 시간과 관계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번 눈을 떴다고 해도 이방인의 염려에 빠져들면 다시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 우리의 마음을 살펴, 거울을 닦듯이 마음의 눈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공중의 새, 들의 백합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변모주일에 함께 예배하신 모든 분들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둠 기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을 봅니다. 그들은 침묵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우리도 배우게 하옵소서. 민족의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에서 예배하는 이들도 기억하여 주시고,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 모두를 주님,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보다도 귀한 존재라고 하셨으니 이방인의 염려에 빠져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pt음성설교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